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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553)] 수식으로 빚어낸, 삶의 진실과 따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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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553)] 수식으로 빚어낸, 삶의 진실과 따스함

가을이 무르익어갑니다. 시린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이때가 되면 따뜻한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인간관계는 이해관계에 얽혀 빈틈이 없습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이런 굴레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소통이 막히고 경쟁만이 살아남은 이런 시대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책이 있습니다. 오가와 요코가 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다시 꺼냈습니다.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기운을 전해주는 책이지요. 루트라는 기호로 사람을 껴안는 포근함이 소리 없이 번져옵니다.

노수학자인 ‘박사’와 가사도우미인 ‘나’, 열 살배기인 ‘나의 아들’, 이 세 꼭짓점을 수학이라는 선이 연결하고, 그 여백에 야구가 무늬를 넣어주지요. 수학은 어렵고 딱딱한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수학이 소통과 공감의 매개가 된다는 신선한 발상이 돋보입니다. 문학과 수학의 결혼, 그 속에서 태어난 풍부한 의미와 웅숭깊은 정신은 오랜 울림으로 남습니다.

박사는 교통사고 때문이 기억이 1975년에 멈춰 있고, 새로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 집에 가사도우미로 온 나는 그의 괴팍한 차림과 엉뚱한 행동에 당황합니다. 하지만 박사의 따뜻한 마음과 수에 대한 열정을 알고 ‘나’와 나의 아들은 박사와 친구가 되어 1년간 빛나는 추억을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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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수학은 학문을 넘어 세 사람이 소통하는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언어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지만 소통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간단한 기호와 수식만으로 서로 소통하고 관계를 발전시켜나갑니다.

“내가 서 있는 지면을 보다 깊은 세계가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나는 놀라고 감탄한다. 그곳에 가려면 숫자의 사슬을 타고 내려가는 방법밖에 없다. 언어는 무의미하고, 끝내는 내가 깊이와 높이 중 어느 쪽을 지향하려 하는지 구별조차 불분명해진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사슬의 끝이 진실과 이어져 있다는 것뿐이다.”
박사의 수식을 만지며 ‘나’는 정확성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또한 그 정확성은 진실성을 품고 평온한 세상으로 이끌어갑니다. 정확성 속에 진실이 깃들고 평온한 삶이 흐른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박사는 또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그러나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지.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어.”

이 말은 듣고 ‘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지탱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보이는 세상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품 속의 박사와 ‘나’가 강조하듯이 보이지 않는 곳에 진실이 숨어있으며, 이 진실이 보이는 세상을 떠받치는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의 힘은 이해관계를 초월한 휴머니즘에서 비롯됩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수식에만 의존하는 박사를 인내와 배려로 싸안아주며 소통을 이뤄내는 ‘나’와 루트, 루트의 작은 행동 하나를 기적처럼 받들며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붓는 박사, 이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무늬는 큰 감동을 줍니다. 또한 이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가식과 편견, 이기심 속에 갇힌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무한경쟁 시대에는 자신만의 차별성이 성공의 핵심 요인으로 인정받습니다.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신봉하는 시대에 이런 정신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신이야말로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고 영혼이 황폐화되어가는 병폐를 치료할 백신이 아닐까요?
김종두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대구회장 김종두(심인고등학교 수석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