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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살아있는 것의 반증…혹평받았던 비키니·미니스커드 대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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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살아있는 것의 반증…혹평받았던 비키니·미니스커드 대유행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비키니와 미니스커트
비키니, 남태평양 비키니 섬의 충격적 수소폭탄 실험에서 이름 차용

미니스커트, 퇴폐와 반항의 천 조각에서 너도나도 입는 패션아이템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충격’과 ‘놀라움’으로 큰 화제가 된 생활용품이 우리주변에는 꽤 있습니다. 특히 의류에서는 여성용품이 두드러지는데, 그 까닭은 아무래도 기존의 통념을 깨는 물건들이 여성 쪽에 더 많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946년 7월 초, 전 세계를 경악케 하는 두 가지 사건이 연달아 발생합니다.

처음 사건은 7월 1일 미국이 남태평양 비키니 섬에 ‘인류 평화를 위해 핵실험을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개적으로 수소폭탄 실험을 감행한 일이었습니다. 이때 사용된 폭탄은 불과 1년 전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의 3800배의 위력을 지녔으며, 이 실험으로 비키니의 3개 섬과 반경 수십 킬로에 생존하던 모든 생명체는 멸종이 되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본래 ‘코코넛의 섬’이란 뜻을 지닌 ‘비키니’가 ‘놀라움’ 또는 ‘파괴’의 대명사로 바뀌어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미스월드에 참가한 미인들의 비키니 의상.이미지 확대보기
미스월드에 참가한 미인들의 비키니 의상.
그리고 불과 4일의 시차를 둔 1946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의 모르토르 수영장에서 또다시 사람을 경악케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날 수영장에는 만여 명이 모여 여성 수영복 패션쇼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한 여성이 가슴과 아랫도리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배꼽과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채 사람들을 향해 포즈를 취하자 어떤 이는 고개를 돌리고, 어떤 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일부 여성들은 얼굴을 붉히며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여자가 배꼽과 허벅지를 보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디자인을 제시한 사람은 란제리 가게를 경영하던 ‘루이 레아드’라는 디자이너였습니다. 그는 본인의 파격적인 수영복 디자인에 대해 며칠 전 충격의 단어가 된 ‘비키니’ 말을 차용하여 ‘비키니 수영복’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아무튼 쇼를 지켜보던 기자와 사진작가들은 즉시 프랑스 전역은 물론 세계에 이날의 비키니 쇼를 사진과 함께 타진했고, 언론에 접한 각국의 반응은 놀라움과 함께 비난 일색의 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가장 격분한 곳은 바티칸으로 ‘치욕적이고 죄악이다’라고 혹평했으며, 이태리·스페인·포르투갈은 비키니 의상을 법으로 금지한다고 공표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공산주의 소련에서는 ‘퇴폐적 자본주의의 전형’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비꼬는데 비키니를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는 ‘놀랍다’는 반응 이외에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반응 탓이었는지 몰라도 충격적인 ‘비키니 수영복’은 프랑스 국내 여성에게도 역시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 판매가 저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키니 섬에서 원폭 실험을 한 미국 내에서는 레아드의 비키니 수영복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었습니다. 그리고 5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그동안 혹평을 했던 유럽 여러 나라조차도 법적 제재를 해제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비키니를 찾는 여성이 많아졌으며, 여성들의 여름 수영복은 당연히 비키니 차림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덕에 과감하게 비키니를 선보였던 레아드와 누드모델 미셀린은 최고의 주목받는 유명인이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일부 복식 전문가들은 비키니를 ‘여성 해방 역사의 한 축’으로 말하는데, 다소 과장된 점은 없지 않으나 비키니를 통해 여성의 몸매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겠습니다. 또한 비키니의 영향으로 이후 여성들의 의상은 더욱 대담해졌고 다리 노출도 일상화 되어 가더니 급기야 1950년대 후반에는 무릎 위 까지 다 드러나는 미니스커트가 등장하여 보수성향의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습니다.

걸그룹 소녀시대의 가수 효연이 16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16 S/S 헤라 서울패션위크', 첫 무대를 연 프리마돈나'FLEAMADONNA' 컬렉션에 참석하고 있다./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걸그룹 소녀시대의 가수 효연이 16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16 S/S 헤라 서울패션위크', 첫 무대를 연 프리마돈나'FLEAMADONNA' 컬렉션에 참석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오늘날의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당당히 거리를 걸으며 각선미를 자랑할 수 있지만 이러한 문화는 불과 5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초는 미니스커트를 발명한 영국 여성 ‘메리 콴트’였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의상 디자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겨우 6세 무렵에 침대보를 잘라 옷을 만들었고 10대에는 교복을 직접 수선해 입었습니다. 골드스미스 예술학교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첼시에 '바자(Bazaar)'라는 이름의 부티크를 열며 본격적으로 그녀만의 색깔을 담은 독특한 디자인의 옷과 액세서리로 '바자'를 가득 메웠습니다.

깔끔하면서 단순한 그녀의 디자인은 당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너도 나도 메리 퀀트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 메리 퀀트는 위험할 정도로 짧은 미니스커트를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유행을 앞서가는 몇몇 여성에 한정되어 큰 인기를 끌지 못하였는데, 1965년 미국에서 미니스커트 패션쇼를 열고 난 후 영국보다 미국 현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특히 미국 여자 고등학생들은 학교 측에 미니스커트를 입게 해달라는 농성을 벌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한편 양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의 초미니 스커트를 본 소위 ‘점잖은 사람들’은 기가 질려 그 옷에 대하여 “매춘부나 입는 의상”이라며 맹비난을 하였고, 학교나 교회에 입고 오면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메리 퀀트는 여타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패션은 살아있는 것의 반증’이라는 신념으로 지속적으로 제품을 생산하였으며, 결국 혁명과도 같은 미니스커트 거리 문화를 정착시키게 되었습니다.

1966년 메리퀀트는 보수의 아이콘인 버킹엄 궁전에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 되지 않는 이런 진풍경에도 버킹엄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색하며 반기었습니다. 이날 메리퀀트는 영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미니스커트가 세계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며, 무역수지에 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보수적인 영국인일지라도 국가경제에 큰 몫을 해내는 미니스커트와 그런 복장을 하고 나타난 메리퀀트가 더없이 매혹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여성 복장의 혁명이 된 미니스커트는 결국 젊음의 감성을 대변하는 <카나비 스트리트 룩 – 1960년대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옷차림>의 기원이 됩니다. 이 후 ‘미니스커트의 창시자’로 불멸의 패션 아이콘이 된 메리퀀트는 미니스커트에 어울리는 팬티스타킹, 부츠 등 여러 감각적인 아이템을 만들며 전 세계에 ‘모드 룩’을 유행시켰습니다. 아울러 패션과 문화의 변방이었던 런던거리 풍경에 싱그러운 여성미를 강조하고, 그녀 자신도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니스커트에 대한 찬반 논쟁은 1970년대 중반 까지 이어졌으며 반대 측에서는 퇴폐와 반항의 천 조각이라고 미니스커트를 폄하하였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이미지 확대보기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그러는 동안 ‘히피문화’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빠르게 확산 되면서 미니스커트의 논쟁은 잠잠해지고, 여성이 바지 입는 문제가 새로운 논쟁으로 사회 전체를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초기 미니스커트의 현상처럼 바지 차림의 여성은 교회나 공공건물 혹은 음식점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찰도 잠시, 채 10년도 되지 않아 여성들은 미니스커트이건, 바지차림이건, 비키니이건 자신들이 원하는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문화란 결국 고정관념의 틀을 깨면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비키니와 미니스커트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