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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한류스타(7)] 이규서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 음악감독 겸 지휘자…'동네 교향악단' 이끌던 소년 세계적 지휘자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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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한류스타(7)] 이규서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 음악감독 겸 지휘자…'동네 교향악단' 이끌던 소년 세계적 지휘자를 꿈꾸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구립 청소년교향악단서 활동

인문계 고교 진학했다 방향 바꿔 피나는 노력으로 서울대 음대 입학
정 교수 만나며 일취월장 "구도자적인 삶 살겠다" 다짐

이규서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OES 음암감독 겸 지휘자이미지 확대보기
이규서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OES 음암감독 겸 지휘자
이규서(李圭曙)는 1993년 서울에서 교육자 집안인 아버지 이준영과 어머니 채문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마흔이 되어 본 늦둥이 독자 규서는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부부는 하나뿐인 만 다섯 살의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친구로 선물했고, 규서는 또래보다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초등학생 때는 축구부에서 운동을 제의받을 정도로 운동도 잘했다.

규서는 음악을 하면서 지휘자가 되거나 음악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나이가 지긋한 부모는 외동아들이 음악을 전공해서 생계를 꾸리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고, 규서가 음악적 성취를 이룰 때마다 ‘음악은 취미’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규서는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을 양성하는 신일고교를 거쳐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서 지휘를 전공하는 4학년 대학생이다.

바이올린 개인레슨 외에 영재원이나 음악학교 경험이 없는 규서에게 운명적 기회가 찾아왔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거주하던 동네에 구립 청소년교향악단이 생겼다. 규서는 창단 멤버로서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이듬해 수석 단원을 거쳐 악장이 된다. 고교생 선배들도 있었지만 초등학생 어린이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단원들의 대표가 된 획기적 사건이었다.

규서는 고등학생 때까지 8년여 가까이 악장으로 활동했다. 그에게는 이때가 어울림의 가치를 깨닫고, 음악의 즐거움을 맛보며, 사회성과 리더십을 배웠던 시기였다. 그 중심에서 하나의 작은 사회인 오케스트라가 운영되는 원리를 터득한다.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의 권유에 따라 일반 중학교로 진학, 음악으로 심성을 다듬으며 무사히 학교생활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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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전 세계 연주 실황들을 살피다가 밤잠을 줄이기 일쑤였으며 베를린필하모닉과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연주를 접하고 나서 지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노 거장의 손끝에 100명이 넘는 세계 정상의 음악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 그 감동으로 지휘 제스처를 열심히 따라하던 시절이었다. 규서는 전교 1등의 성적에 공차기도 좋아했다.
중학교 졸업 무렵 독학한 작곡 실력으로 학교에 4관 편성짜리 교향시(交響詩)를 헌정했고 프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소재 음대 재학생과 졸업생 단원들로 구성된 세종문화회관 산하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었다. 당시 지휘자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전임지휘자로서 현 창원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박태영 교수였다.

이때 규서는 서울시향 연습실에 처음 발을 디뎠고, 리허설을 하며 잘 다듬어진 오케스트라 소리에 맞춰 연주했을 때의 느낌은 직업 음악가가 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할 정도로 각인되었다. 규서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설계하고 준비할 수 있었던 시기에 인문계 고교에 진학한다.

모태 신앙의 기독교도인 규서는 기독교 학교에서 자유로이 기도하며 자신이 나아갈 길을 구했다. 고교 1학년 때는 교내합창단 대신 급우들을 모아 학교 대표로 서울시합창대회에 출전, 단체 준우승과 지휘자상을 수상한 쾌거를 이루었다. 눈물로 영접했던 십년을 해왔던 음악의 본질, ‘순수한 음악은 말없이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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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동문합창단 연주에서의 격려, 한 관객은 “꼭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달라”고 당부했다. 규서는 자신의 작은 재능이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지금까지 규서는 마음속에 그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지휘자에게 총보를 소리로 구현시켜줄 수 있는 피아노, 규서는 매일 빈 예배당에 몰래 들어가 혼자 피아노를 독학했다.

마음의 유동, 입시공부를 하면서 베토벤, 브람스, 구수타프 말러 교향곡 심포니 스코어를 꿰고 있었고, 저녁 공부시간에도 ‘인강’ 대신 아바도와 여러 거장들이 지휘하는 브람스 교향곡 연주 영상을 감상했다. 이때 한국 최고의 지휘자 임헌정 선생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막연히 그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중생활을 하다가 고3을 앞둔 방학에 음악을 전공하기로 결심한다.

반대 입장이던 부모님은 결국 음악을 전공하겠다는 자식의 뜻을 지지했고, 아버지는 직접 레슨 선생님을 구하기에 이른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음대 입시, 그것도 전혀 다른 분야의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규서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규서는 열아홉 살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교습을 받아본 피아노를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하며 3일 만에 바이엘을 떼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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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피아니스트 손은정과 베토벤 소나타를 치고, 쇼팽 에튀드도 연습해 나갔다. 생소한 기호와 씨름하며 화성학을 시작했고, 상대음감이 강한 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절대음과 청음 훈련을 한다. 행운의 첫 지휘 선생인 구모영(현 천안시향 상임지휘자)을 만나게 되고, 그는 규서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파악, 이해해주고 현악 전공자의 입장에서 장단점을 보완한다.

음악 공부에 치중하며, 복에 넘치는 선생들을 만나 속전속결 진행하던 입시는 수능성적 부족으로 재수를 하게 된다. 독일로 도피 유학을 생각하기도 한 규서는 재수 끝에, TV에서나 보던 대학교수 3인의 최종면접관 앞에서 그들을 농담으로 웃겨가며 준비해간 것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돌아왔고, 장학금을 받고 서울대 음대에 입학한다.

규서는 꿈에 그리던 임헌정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임 교수의 부재 시 새내기로 지휘도 맡게 된다. 말러의 교향곡 1번을 포함한 세 시간여의 논스톱 리허설이 끝났을 때 음대생 모두가 규서의 지휘에 만족해하며 환호했다. 임헌정 교수는 한국 최고의 음대생들의 교향곡들을 한 주 내내 들으면서 행복한 학교생활을 즐기는 규서를 늘 존중해주고 능력과 성취를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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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서는 음악과 사귀면서 청춘의 좋은 날들을 다 보내도 악보에 둘러싸여 사는 삶을 행복해한다. 그는 졸업생 주축의 동문 챔버 오케스트라를 현재까지 3년째 이끌고 있다. 철저히 준비하며 발로 뛴 결과 규서는 창단 연주를 세종문화회관에서, 그 이후의 모든 연주들을 예술의전당에 올리면서 명실공히 주류 음악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악단으로 가꿔나가는 중이다.

이화여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지휘, 서울대 의과대학의 개교 70주년 세종문화회관 특별 연주,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창단 10주년 기념음악회 지휘, 소외지역 교회 음악회를 열면서, 좋은 음악은 사람과 사회를 분명 변화시키며, 어려운 것은 지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믿는다. 비밀스러운 교감의 기쁨을 만끽하며, 지휘라는 것이 평생을 바쳐 해야 할 과업이라고 생각하는 규서는 늘 부족함을 인식하고 구도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의심하지 않고 연주회장을 찾을 수 있는 지휘자’ ‘다음 세대가 마음 놓고 배우러 갈 수 있었던 선생’이 되고 싶은 그는 짧은 여름휴가 뒤, 8월 26일에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인천시립교향악단과 데뷔 연주, 9월 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OES)의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있다. 명지휘자로서 조국의 명예를 빛낼 그의 꿈이 만개하기를 기원한다.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