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 김남주의 에세이 '사라지는 번역자들(마음산책)
[글로벌이코노믹 노정용 기자] "프랑스어를 우리말로,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책 한 권에서 한두 번쯤 그런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품고 있는 침묵의 저변이 아주 넓은, 그 깊이가 아주 깊은 문장. 그럴 때면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그러고는 내버려둔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들여다본다. 그러다보면 온다, 그 순간이."30여 년간 번역자의 삶을 살고 있는 김남주씨가 저자의 뒤에 숨어서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투명한 유리같은 존재로서의 고뇌를 담은 산문집 '사라지는 번역가들'(마음산책)을 펴냈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김씨는 1988년 프랑스 현대문학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번역에 뛰어들어 '여자의 빛' '솔로몬 왕의 고뇌' '가면의 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등 수많은 작품을 옮겨왔다.
그녀에 따르면 번역은 단순히 글자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로 옮겨지지 못할 경우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는 다른 언어가 하나 더 놓이는데, 그것이 중역이다. 저자는 "이것을 한 사람의 역자가 아니라 두 사람의 역자가 원문에 개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함께 구조주의 문학 이론을 수립한 제라르 주네트는 번역을 '겹쳐 쓴 양피지'에 비유한다. 양피지 위에 원래 쓰인 글자들을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글자를 쓰면, 아무리 잘 긁어냈다 해도 새 글 아래에는 여전히 이전 글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어 "문학 번역에는 혼자 책임져야만 하는 극히 개인적인 면이 있고, 그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프랑스 아를의 번역자회관에서 지내는 동안 유럽, 남미, 아시아 각지에서 모인 번역자들과 나눈 '좋은' 번역과 번역자로서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두루 담고 있다.
이와 함께 번역자의 최대 고민인 직역과 의역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저자는 조르주 무냉의 견해를 빌어와 번역은 유리가 있다는 것을 즉각 알 수 있는 직역, 곧 '채색 유리'와 유리가 없다고 착각할 정도로 완전히 투명해진 '투명 유리'로 나뉜다고 한다. 투명 유리는 원문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대응에 충실한 직역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새롭게 번역한 의역을 말한다. 그러나 채색 유리든, 투명 유리든 번역자는 유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 앞으로 나설 수 없고 텍스트를 넘어설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리가 되어야 할까? 어떻게 사라져야 옳은가?"
이 책 '사라지는 번역자들'은 번역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삶의 한 방식으로서의 번역에 관한 다채로운 해석과 감회를 털어놓으면서 불가능한 번역의 성역에 대해 도전한다.
노정용 기자 no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