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으로 대마도는 ‘한·일 간 다리’였다. 항공이 상용 교통수단이 되기 이전에는 대마도를 거치지 않고 두 땅을 왕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북상하는 구로시오 해류가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대한해협 225㎞는 평화로운 바다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사이에 대마도가 있었다. 대마도는 그 태생이 행운의 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부산에서 대마도 북단까지(49㎞) 배로 가고 대마도 육로(80여㎞)를 거쳐, 대마도 남쪽에서 규슈까지(82㎞) 배로 건너가면 되었다. 만주 등 북방 지역이나 한반도에서 일본에 갈 때 부산에서 모여 대마도를 거쳐 건너갔다.
우리는 과거 일본인에 대해 ‘왜구’라는 악성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이미지를 더욱 고착시킨 것이 바로 대마도 왜구[對馬賊]다. 조선 조정은 대마도 사절단에게 예를 갖춰서 위로하기도 했고 갈 때에는 물건을 있는 대로 주어 후대했으나, 대마적들은 끊임없이 한반도에서 노략질했다. 남해안뿐만 아니라 평안도까지 올라왔다. 조선 태종은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궁벽하게 막혀 있고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오히려 본국을 괴롭히고 있다고 한탄했다. 현대 선진국 일본인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중첩돼 뿌리 박힌 ‘노략질 왜구’라는 어구가 상존하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조선 초 명신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게 되니, 그들을 달래되 제 도리대로 하면 예를 갖추어 수호하게 되려니와 제 도리를 벗어나게 되면 갑자기 노략질을 함부로 할 것이다”라고 썼다. 신숙주는 임종을 앞두고 성종 대왕에게 “일본과는 화친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신신당부한다. 최근 한·일, 한·중 등 국제 관계가 급변하고 있는 시점에서 신숙주의 ‘이웃과의 화친’ 교훈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마도를 여행하면서 ‘역사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이 섬의 진가를 잘 나타내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한 ‘대마도’보다는 ‘쓰시마’다. 쓰시마는 ‘진도(津島)’의 음을 따른 이름이다. 쓰시마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길이(905㎞)가 매우 길고, 만마다 많은 포구(82개)가 설치되었다. 대마도인들은 남북 긴 섬에 동서 바다를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었다. 작은 배를 육지로 끌어올린 ‘소선월’, 큰 배를 이동하기 위해 운하를 판 ‘대선월’은 그들의 삶의 지혜다.
신숙주의 유언과 같이 쓰시마가 ‘화친의 섬’ ‘선린의 섬’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토착 왜구’와 같은 사나운 용어들이 사라졌으면 한다.
이영한 지속가능과학회 회장(서울과학기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