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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돌 한글날,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훈민정음과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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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돌 한글날,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훈민정음과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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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글로벌이코노믹
9일 572돌 한글날을 하루 앞으로 앞두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홀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그를 반대한 집현전의 이야기를 살펴봤다.

◆ 친히 글자를 만든 세종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를 보면 훈민정음이 등장한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이 등장한 내용은 이렇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참고)

1443년 12월 우리에게는 한글, 처음 이름은 훈민정음이었던 글이 등장하게 됐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기록 맨 앞을 보면 '이달에 임금이 친히'라고 밝히고 있다. 즉 세종대왕이 직접 이 글자들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다.

한글문화연대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세종이 몸소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 국민이 17%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집현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 집현전 학자들은?


집현전 학자들은 창제 이후 반포까지의 기간 동안 해례본을 만드는 작업을 하거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기도 했다.

해례본 작업에 나섰던 인물들은 정인지를 필두로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다. 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 1446년 9월 29일 기사로 남아있는 정인지의 서문에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반대로 훈민정음을 언문이라 칭하며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던 최만리의 상소를 보면 알 수 있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이두(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글자)가 있다며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오랑캐)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라고 주장했다.

이에 세종은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한 것이다"라며 훈민정음 창제의 뜻을 꺾지 않았다.

이렇듯 훈민정음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담긴 우리의 유산이다.

572돌 한글날 그 뜻을 다시금 마음속에 새기는 날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홍성일 기자 seongil.h@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