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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는 가족·이웃간 희망의 믿음을 확인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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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는 가족·이웃간 희망의 믿음을 확인하는 자리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270)] 희망을 위하여 추석은 필요하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개막일인 2일 경북 안동 하회마을 공연장을 찾은 시민들이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며 추석 연휴를 즐기고 있다.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개막일인 2일 경북 안동 하회마을 공연장을 찾은 시민들이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며 추석 연휴를 즐기고 있다. 사진=뉴시스
모처럼 긴 추석 연휴를 맞아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우리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매일매일이 한가윗날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가위 추석에는 오곡백과(五穀百果)가 풍성하고, 이날은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어릴 적 고향 친구들과 잘 먹고, 즐거운 놀이를 하며 놀게 되므로 만나는 이웃들이 모두 정겹고 마음이 넉넉하니 당연히 일년 열두 달이 모두 이날만 같았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화해보다는 갈등을, 사랑보다는 미움을, 화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하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 젊은이들은 미래를 걱정하며 결혼을 늦추고 자녀 갖는 것을 멈추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저출산으로 한반도의 미래가 심각하게 염려되고 있다. 더 나아가 아예 직업을 갖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은둔자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가 바뀔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증폭되는 것처럼 보인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 타협하고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권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고, 편을 갈라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있다. 치안은 날로 갈수록 험악해져 이제는 대낮의 거리와 산책로에서도 여성들이 잔혹한 공격을 당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갈등·미움·분열된 한국 사회…열심히 살아갈 희망 잃어


한 사회의 문제는 그 원인이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해결책을 찾기 어렵고, 또 해결책을 찾았다 하더라도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손놓고 무기력한 상태로 지낼 수는 없다.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갈등의 기저에는 절망감(絶望感)이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열심히 살아갈 희망(希望)을 잃었다는 것이다.

절망은 정신과 육체를 파멸케 하는 강력하고도 무서운 감정이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체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절망은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마음을 버리거나 또는 그런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까지 불렀다. 실제로 심한 절망에 빠진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제 한국 사회는 한때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린 그 역동성을 되찾아야 한다. 1950년대 초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전 세계가 놀란 경제적 부흥을 이룬 저력이 있는 나라이다. 1953년 67달러에 불과했지만 2023년 현재 33,393달러로 기적적안 경제 부흥을 이루었다. 1970년대 전국을 풍미하던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노래 가락이 다시 한번 흥을 돋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 있어야 목표 달성 가능


절망의 반대는 희망이다. 희망(希望)은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난관을 극복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희망이 중요하다는 격언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난관을 극복한 위인(偉人)들의 성공담은 넘친다. 하지만 희망은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지라고 권유하거나 강요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희망은 마치 행복과 같아서 그것을 원하거나 또는 열심히 찾아 헤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은 목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산물(副産物)이다. 마치 행복이 원하는 무엇을 노력해서 얻었을 때 나타나는 긍정적 감정인 것과 같다.

희망은 신뢰(信賴)할 수 있을 때 생기는 자아의 힘이다. 전생애발달심리학자 에릭슨(Erik Erikson)에 의하면, 우리 삶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자아의 힘은 신뢰이다. 그래서 그는 갓난 어린이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획득해야 하는 자아의 힘을 “기본적 신뢰”라고 불렀다. ‘기본적’이라는 말은 신뢰는 삶의 가장 초기에 배워야 하는 것이고, 남은 삶 동안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신뢰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고, 또 그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역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강한 신뢰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모토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려울 때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불신(不信)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은 결국 자신이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큰 힘이다. 어려울 때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스스로 고난을 헤쳐나가는 힘을 기르지 못한다면 결국 목표를 이룰 수 없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기” 때문이다. 아무리 옆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불신이 없는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누구를 믿지 않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믿을 것과 믿지 못할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분별력이 없이 속는 것에 불과하다. 살아있는 자신을 자칭 메시아라고 속이는 사기꾼에 현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은 신뢰를 깊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게 잘 속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불신보다는 신뢰가 더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강하게 신뢰하기 위해서 불신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신이 있어야 한다. 다만 불신보다 신뢰가 더 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신뢰의 강도는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불신의 강도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 절실


불신보다 신뢰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은 “희망(hope)”을 가질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철학자로부터 수많은 위인들까지 희망을 노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겸 저술가인 키케로(Cicero)는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희망이 없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도 된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내가 죽음만큼 힘들 때 도움을 줄 것이고, 결국은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도 “두려움은 희망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희망의 짝은 절망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희망은 현실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현재는 비록 힘들지만 미래에는 잘 될 것이라는 믿음 위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본질은 꿈꾸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함께 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미래는 없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그 두려움을 능가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려울 때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두려워서 미래를 마주할 수 없다. 미래가 없는 삶은 죽음이다. 그래서 신뢰보다 불신이 큰 사람은 항상 두려움에 떨게 된다. 하지만 항상 두려움에 떨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을 도와줄 그 무엇을 스스로 만들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상(偶像)’이다. 우상은 “특정한 믿음이나 의미를 부여하여 나무, 쇠붙이, 돌, 흙 따위로 만든 형상”이나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을 뜻한다. 그만큼 사람은 두렵고,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신뢰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신뢰의 대상은 우리 삶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 대상이 없다고 느껴질 때는 스스로 만들어 믿어야 할 만큼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고 두려움을 떨며 사는 존재인 것이다.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수많은 내우외환을 견디며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온 한민족은 그만큼 강한 신뢰의 대상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위기의 순간에 제일 믿을 수 있는 대상이다. 그리고 서로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조상의 은덕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도처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성묘와 제사를 위해 ‘민족의 대이동’을 감행하는 실질적 이유가 되기도 한다.

추석은 그 믿음을 확인하는 자리이다. 때마침 수확이 철을 맞아 풍부한 음식을 장만할 수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지고 넉넉해진다. 나를 위험에서 구해줄 가족들을 직접 만나고 그 관계를 확인할 수 있으니 “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윗날만 같아라”라는 노래가 나오는 것이다.

다시 한번 희망을 노래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호(口號)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조언이나 충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내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도와주는 경험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한가위의 넉넉한 마음으로 한 사람의 이웃이라도 돌보는 경험이 쌓일 때 사회는 변한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