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작 연대기(63)] 한국적 레파토리의 성장, 양영은(발레안무가, M발레단 단장, 국민대 공연예술학부 겸임교수) 탐구

M발레단의 신작 '구미호'는 원전 '산해경'의 구미호를 경전 삼아 대중적 인기의 수위를 차지하는 한국적 귀신과 요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생산된 새로운 방식의 ‘한국적 판타지 발레’이다. 발레 '구미호'는 지혜와 풍요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예쁜 여성으로 변신하여 남자의 정기나 인간의 간을 빼먹는 꼬리 아홉의 구미호 이야기는 증발한다. 여우의 신령함을 탐내는 귀신과 인간들의 욕망이 드러나며, 그로 인해 희생되는 순수한 여우와 인간의 사랑이 그려진다.
M발레단을 창단하여 예술성과 대중성을 갖춘 창작발레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문병남 단장의 유지를 이은 양영은 역시 다양한 소재와 접근법으로 창작발레에 지대한 공을 들이고 있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설화 바탕의 창작발레의 경향에서 벗어나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며 새로운 장을 열었고, 안무가 양영은이 10년간 문 단장과 꾸준히 수정·보완하면서 작업에 몰두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신작 '구미호'는 창작발레의 새로운 흐름을 전개한 작품이다.






동쪽 산 정상에서 마을을 조망하는 구미호 수호. 마을 사람들은 풍요를 선사하는 신령함의 상징 구미호를 섬긴다.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자장가 ‘섬집아기’의 선율이 흐른다. 동생 애호는 새타니 귀신을 품은 아기에게 연민을 느끼고, 수호는 그런 애호의 미래를 걱정한다.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소화는 예쁜 여인으로 커온다. 스산한 멜로디에 기묘한 타악이 ‘여우산’의 밤을 묘사한다. 소화가 커오자 음산한 기운이 산속까지 퍼진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여우들이 깨어나고 군무는 얼굴만 보이는 ‘여우산’을 만들어간다. 수호가 나타나자, 여우들은 더욱 신나는 파드되를 선보인다.
소화는 애호와 사랑에 빠지나 순리를 거스른다. 그녀의 휘파람 소리는 마을의 흉사를 부른다. 한국적 멜로디에 소화와 마을 처녀들은 춤을 춘다. 손을 얼굴 옆에 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동하는 동작이 얌전한 처녀들의 모습이다. 애호는 소화 곁을 지키다가 사랑에 빠진다. 마을을 이끄는 청년, 화민은 귀신 들린 소화를 없애야 한다며 사람들을 부추기자, 처녀들은 소화를 들어 당기고, 공중에 돌리며 괴롭힌다. 화민의 솔로는 빠른 고난도 회전으로 무대를 압도한다. 애잔한 첼로 곡에 소화의 독백 솔로가 이어진다. 가녀린 몸짓에 애달파하는 애호의 모습이 엿보인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우산’, 통통 튀는 피아노 멜로디에 아기 여우 네 마리의 앙증맞은 춤이 시작된다. 빠른 속도의 아기 여우들의 발동작들은 귀여운 움직임으로 깜찍하다. ‘여우산’에 처음 다다른 소화는 불안하고 낯설지만, 휘파람 소리에 곧 안도한다. 애호는 ‘여우산’에 온 소화를 보며 용기를 내어 다가간다. 애호를 처음 본 소화는 놀라지만 이내 마음을 열고 파드되를 이어간다. 멜로디는 점차 확장되고 고난도 회전과 여자를 들어 올리는 리프트 기교가 사랑에 빠지는 어린 두 주인공의 설레는 마음을 표현한다.
실로폰 소리로 강세를 준 음악이 수호의 신령함과 미호의 기묘한 매력을 표현한다. 수호는 화를 부르는 이들의 사랑을 감지한다. 수호의 묵직한 솔로로 시작된 이 장면은 여자 여우들의 수장인 미호와 수호의 파드되로 이어진다. 애호가 나타나자, 트리오가 된다. 서로 밀고 당기며 형에게 반항하는 동생과 저지하는 형의 모습이 묘사된다. 미호는 이들을 말린다. 정월 대보름 밤, 수호를 섬기는 여우구슬제가 열린다.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남자 군무는 각 잡힌 고난도 군무를 선보이고, 여자 군무는 구슬을 들고 부드러운 춤사위로 제의를 이어간다. 애호는 소화와 평생을 약속한다.
강항이 스타카토로 연주된다. 영상으로 월식과 귀신이 보이고, 소화의 각성이 표현된다. 휘파람 소리에 소화의 몸 안에 있던 새타니 귀신이 새우니 귀신으로 깨어난다. 화민과 마을 처녀들은 주술에 걸려 여우 사냥을 시작한다. 머리막을 내리자, 무용수들의 다리, 실루엣만을 비춰 각성과 주술 장면이 연출된다. 머리막이 조금 올라가자 느리지만 날쌔게 동작이 종료된다. 머리막 영상에는 죽어가는 여우들과 죽은 여우들이 쌓인다. 머리막이 다시 올라가면 분노한 수호가 나타난다. 미호는 소화를 죽이는 것이 귀신을 소멸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자, 수호는 처단을 결심한다.
무거운 북소리에 맞춰 여자 여우들이 나타난다. 미호는 수호의 전사들인 흰 여우들을 모아 소화 쪽으로 진격하고 소화의 몸을 가둬 새우니 귀신을 포획한다. 발끝 이동의 ‘브레’ 동작으로 숲속에서 귀신들이 등장한다. 여자 여우들의 음산한 군무가 이어지고, 긴 막대를 든 미호의 부름에 소화가 딸려 나온다. 남자 군무가 강한 점프로 소화를 들어 올리고, 여자 여우들에게 잡혀 빠져나갈 수 없다. 애호가 애써보지만, 여우들은 그를 막고, 소화는 남자 여우들에게 들려 수호의 여우 구슬을 맞고 쓰러진다. 괴성과 함께 귀신은 소화의 몸을 빠져나가고 소화는 처참히 쓰러진다.
소화의 휘파람 장면에 나온 소화의 솔로곡, 애잔한 첼로 곡이 반복되며 애호의 품 안에서 죽어가는 소화의 희생이 표현된다. 두 사람은 마지막 힘으로 파드되를 이어가고, 온몸을 떨며 가냘픈 몸짓으로 죽어가는 소화,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놓지 않으려는 애호의 몸짓으로 슬픈 사랑이 표현된다. 사랑의 파드되에서 선보인 제스처들이 반복되며 행복했던 그때의 순간을 기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비친다. 난도 높은 리프트와 극성의 연기가 결합 되어 몰입도를 최고치로 높인다. 목 놓아 우는 애호의 눈물은 비가 되어 흐르고, 폐허가 된 마을에는 깊은 어둠이 드리운다.







안무가 양영은은 영국에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영국 서리대 무용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국제 감각 출중의 발레 안무가이다. 그녀는 한국적 레퍼토리가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한국적 소재의 대본을 쓰고 극성을 강화한 예술성 지향의 클래식 창작발레를 정착시키려는 용감한 도전과 탐구, 치열한 고민, 실천적 노력을 지속해 오고 있다. 작곡과 지휘를 맡아 진정성을 보인 나실인은 뒤셀도르프 시립음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재원이다.
M발레단은 한국발레의 정체성 구축을 신조로 창단(2015)되어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오월바람' 등 한국 대표 창작발레를 성공시킨 선두발레단이다. 해외 사용권 측면에서 한국발레계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창작발레작과 클래식발레 재안무작을 통해 K-발레의 저력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부터 소월아트홀의 상주단체로서 발레로 활기찬 성동구를 만들어왔다. 창작발레 '구미호'는 신작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러 방면에서 노력한 흔적이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