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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트럼프發 '연준 리스크', 70년대 인플레이션 악몽 재현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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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트럼프發 '연준 리스크', 70년대 인플레이션 악몽 재현되나

112년 금기 깬 '이사 해임'…금리 인하 압박으로 경기 부양 '속내'
무너지는 중앙은행 신뢰…달러 기축통화 지위까지 '흔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독립성을 뒤흔들고 있다. 사진=오픈AI 챗GPT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독립성을 뒤흔들고 있다. 사진=오픈AI 챗GPT가 생성한 이미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 연방준비제도(연준) 112년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이사를 해임하며 중앙은행을 노골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고 있다. 지지율 유지를 위해 금리 인하로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치적 계산과 연준에 대한 여당 내 뿌리 깊은 불신이 맞물린 이번 사태는 미국 국채와 달러의 위상 등 세계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닛케이가 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지난 8월 26일 각료회의에서 "곧 (연준 이사회) 과반수를 확보할 것이며 이는 멋진 일"이라며 "사람들은 너무 비싼 금리를 내고 있다"고 말해 연준을 통제하겠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7명의 이사 가운데 4명을 확보하면 연준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 이미 1기 행정부 시절 임명한 2명과 중도 사임한 쿠글러 전 이사의 후임 지명권을 손에 쥔 트럼프 대통령에게 리사 쿡 이사 해임은 '과반 장악'을 위한 마지막 수순으로 풀이된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도 연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했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켜왔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가 아서 번스 당시 의장에게 완화 압력을 가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처럼 공개적으로 의장을 비난하고 이사 해임까지 단행한 경우는 없었다. 1935년 개정 은행법으로 재무장관과 연준 이사의 겸직을 금지한 이래 90년간 이어온 중앙은행 독립성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

◇ '닉슨의 악몽'…정치에 휘둘린 70년대 연준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압박은 1970년대 '대인플레이션'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재선을 앞두고 경기 부양을 위해 번스 의장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1971년 10월 녹음된 기록에는 "나는 서둘러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다"며 선거 패배의 불안감을 토로하는 닉슨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다.

결국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 연준은 섣부른 통화 완화 정책을 폈고, 미국 경제는 두 자릿수 물가 상승이라는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 정책 실패는 1980년대 폴 볼커 의장이 심각한 경기침체를 감수하면서까지 극단적인 고금리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는 결과로 이어졌다. 눈앞의 정치적 이익 때문에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훼손하면 장기적인 경제 안정을 얼마나 심각하게 해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표면적 이유는 주택담보대출 금리 인하, 정부 부채 이자 부담 경감, 달러 약세 유도 등 때에 따라 바뀌지만, 본심은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기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데 있다. 그는 지난 4월과 7월에도 파월 의장 해임을 시사하며 시장을 혼란에 빠뜨렸다. 파월 의장의 임기는 2026년 5월에 끝나는데, 불과 6개월 뒤 중간선거가 치러진다.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 뒤에는 공화당 내에 깊이 자리 잡은 연준에 대한 불신이 있다. 보수 강경파는 연준이 코로나19 이후 물가를 '일시적'이라 잘못 판단해 금리 인상을 늦췄고, 그 탓에 실리콘밸리은행(SVB) 붕괴를 막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연준의 양적완화가 민주당 정부의 재정 확장을 도왔고, 금융 규제 강화나 기후변화 대응 개입 등은 명백한 '정치 편향'이라고 본다.

◇ 무너지는 견제장치…'시장'만 남은 위태로운 방파제


행정부의 폭주를 막아야 할 견제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의회는 과거 연준의 독립성을 옹호했지만, 현재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세에 침묵하고 있다. 사법부 역시 대법원이 대통령의 이사 해임권을 일부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어 최후의 방파제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행동을 막아선 것은 사실상 시장뿐이었다. 그가 파월 의장 해임을 시사했을 때마다 채권·주식·달러 가치가 동반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가 나타났고, '미국 자산 매도'라는 시장의 경고에 놀라 발언을 거둬들여야 했다. 하지만 거듭된 압박에 시장이 '학습효과'로 내성이 생긴 탓인지, 쿡 이사 해임 발표 후 시장 반응은 크지 않았다.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은 "기축통화 달러를 지탱하는 국가적 자산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통화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라고 말했다. 정치권력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중앙은행이 신뢰를 잃는다면, 물가와 경제는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위험한 도박은 미국 경제를 넘어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근본적인 신뢰마저 무너뜨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