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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LG엔솔, 트럼프 이전부터 美 비자 규정 우회…내부 지침 문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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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LG엔솔, 트럼프 이전부터 美 비자 규정 우회…내부 지침 문건 확인

B-1 비자 발급 어려움에 ESTA 권고…"인터뷰서 '일' 단어 쓰지 마라" 구체적 지침까지
트럼프 행정부 대규모 단속에 직원 300여 명 구금…고질적인 관행이 부른 '투자 위험' 현실로
미국 비자 제한을 우회하는 방법을 사용한 LG에너지솔루션.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비자 제한을 우회하는 방법을 사용한 LG에너지솔루션. 사진=로이터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의 비자 규정을 우회한 정황이 담긴 내부 문건이 공개돼 파장이 커지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대적인 이민 단속으로 소속 직원 수백 명이 구금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 가운데, 이러한 관행이 트럼프의 전임 행정부 때부터 이어진 문제였음이 드러나면서 트럼프의 관세를 피하고자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우리 기업들의 잠재된 위험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로이터 통신이 19일(현지시각) 입수한 2023년 8월 자 LG 내부 문건을 보면, 회사는 직원과 협력업체 인력에게 상용 비자(B-1) 대신 전자여행허가제(ESTA)를 활용하라고 권고했다. 미국의 첨단 공장 건설에 필요한 전문가들의 단기 비자 발급이 계속 막히자 내놓은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관행은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이민 정책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이달 조지아주 서배너 근처에 짓고 있는 현대자동차와의 자동차 배터리 합작 공장에서 미 국토안보부 사상 최대 규모의 단속이 벌어져, LG 직원과 협력사 소속 250명을 포함한 한국인 300여 명이 구금된 것이다. 수갑을 찬 노동자들의 모습이 세계로 알려지면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자 주요 투자국인 한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일' 단어 피하라"…위험천만했던 내부 지침


문건에는 ESTA 활용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까지 담겨 있었다. 미국 세관 인터뷰 때 ▲단정한 옷차림 ▲미국 사업 파트너의 초청장 지참 등을 조언하며, 특히 "방문 목적을 설명할 때 '일(work)'이라는 단어를 쓰면 의심을 사 미국 입국이 거부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방문할 때마다 2~3개월씩 머물며 ESTA를 자주 쓰는 행동이 입국 거부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LG에너지솔루션은 "당시 B-1 비자 거부율이 높았고, B-1 비자가 거부되면 ESTA 자격까지 막힌다는 점을 생각해 출장 때 ESTA를 활용하도록 안내했다"고 해명했다. 또 "지난해 3월 지침을 고쳐, 한 달 미만의 단기·일회성 업무에는 ESTA를, 1~6개월 출장에는 B-1 비자 같은 알맞은 비자를 받도록 안내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4일, 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 공사 현장에서 연방 요원들이 단속을 벌이는 동안 구금자들이 서 있다. 사진=로이터 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9월 4일, 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 공사 현장에서 연방 요원들이 단속을 벌이는 동안 구금자들이 서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 관리들은 구금된 인력들이 비자 허가 범위를 벗어나는 활동을 했거나 체류 기간을 넘겼다고 본다. 하지만 구금됐던 일부 LG 직원들을 대리하는 미국 이민 변호사는 이들이 법이 허용한 활동을 했다고 반박했다. 구금됐던 노동자들은 지난주 풀려나 귀국했으며, 환호와 감동의 재회 속에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합리적 사용'과 '남용' 사이…외교 문제로 번져


현재 규정상 최대 90일 머물 수 있는 ESTA는 상용 비자인 B-1(최대 180일)과 달리 취업 활동에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한정애 의원실에 따르면, 이번에 구금된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가량이 ESTA 상태였으며, 이 가운데 LG 직원은 44%에 이른다.

미 국무부 지침은 해외에서 사 온 장비의 설치, 수리, 서비스와 미국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관련 기술 훈련 등은 ESTA나 B-1 비자로 할 수 있는 활동으로 본다. LG 쪽 역시 "출장 직원들은 해외에서 만든 기계 설치와 생산 공정 안정을 위한 준비, 현지 인력에 대한 기술 전수 등을 맡으며 이는 비자의 본래 목적에 맞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민법 전문가들은 ESTA를 이용해 오래 머물고 자주 드나드는 것은 제도를 남용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번 일과 관계없는 미국의 이민 변호사 로버트 마튼은 "처음엔 괜찮았던 ESTA 사용이 남용으로 바뀐 것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일이 커지자 외교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LG는 "여행 목적에 맞는데도 비자 신청이 거부되는 점을 생각해 미국 쪽에 '새로운 비자 유형 신설'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또 LG는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양국 정부가 B-1/B-2 비자와 ESTA로 허용하는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해석하고, 비자 제도를 하루빨리 개선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우리 정부 또한 지난 일요일, 크리스토퍼 랜도 미 국무부 차관이 이번 일에 유감을 나타냈으며, 한국 노동자들의 기여에 걸맞은 비자를 내주도록 양국 간 실무 협의를 서두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