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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엔화, '캐리 트레이드' 부활에 전방위 약세…17년 만의 자금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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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엔화, '캐리 트레이드' 부활에 전방위 약세…17년 만의 자금 유출

마이너스 실질금리·정치 불안에 '안전자산' 지위 상실
BOJ 금리 인상에도 구조적 매도 압력 지속…엔저 장기화 전망
일본 엔화의 가치가 17년 만에 최고 수준의 자금 유출과 '엔 캐리 트레이드' 부활로 전방위적인 약세를 보이고 있다. 마이너스 실질금리와 정치적 불안으로 안전자산의 지위를 잃었으며,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노력에도 엔저 현상은 장기화될 전망이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일본 엔화의 가치가 17년 만에 최고 수준의 자금 유출과 '엔 캐리 트레이드' 부활로 전방위적인 약세를 보이고 있다. 마이너스 실질금리와 정치적 불안으로 안전자산의 지위를 잃었으며,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노력에도 엔저 현상은 장기화될 전망이다. 사진=로이터
미국 달러를 제외한 거의 모든 통화 대비 엔화 가치가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다. 한때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혔던 엔화의 위상이 '조달 통화'로 바뀌면서, 저금리의 엔화를 빌려 고금리 통화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금융시장에 다시 등장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23일(현지시각) 마이너스 실질금리라는 구조적 약점에 일본 정국의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엔화 매도 압력이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은행(BOJ)이 점진적으로 금리를 올리고 있지만, 구조적인 엔화 약세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달러 빼고 다 올랐다…엔화의 '수난'


외환시장에서 엔화의 수난이 이어지고 있다. 특정 통화에 대한 일시적 약세가 아닌, 통화 바스켓 전반에 걸친 가치 하락이다. 지난 18일, 엔화는 스위스 프랑 대비 1스위스 프랑당 187엔대까지 밀리며 사상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9월 들어서만 수차례 최저 기록을 새로 썼다. 유로화 대비 약세도 두드러진다. 19일에는 1유로당 174엔대 중반까지 내려, 지난해 7월 기록했던 역대 최저치(175엔대 중반) 턱밑까지 다가섰다.

엔화 약세는 특정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국 파운드 대비로도 연중 최저치인 1파운드당 201엔대 초반까지 밀렸고, 대표적인 고금리 신흥국 통화인 브라질 헤알과 멕시코 페소에 대해서도 연중 최저치 수준까지 가치가 떨어졌다.

엔화가 유일하게 현상을 유지하는 상대는 미국 달러뿐이다. 엔화가 강해서가 아니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동결과 완화 가능성 때문에 달러 자체가 약세를 보이는 영향이다. 달러를 제외한 모든 통화 대비 엔화의 추락에는 제동이 걸리지 않는 상황이다.

17년 만에 귀환한 '엔 캐리 트레이드'


금융시장에서는 이러한 전방위 엔화 약세의 핵심 동력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를 꼽는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거의 없는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다른 나라 통화나 자산에 투자해 금리 차익과 환차익을 동시에 노리는 거래다. 지난해 하반기 잠시 멈췄던 이 거래가 올해 다시 활발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일본은행이 발표하는 '본지점 계정' 통계다. 이 지표는 외국계 은행의 일본 지점이 자국 본점 등으로 보낸 자금 흐름을 보여주며, 캐리 트레이드를 위한 엔화 조달과 해외 송금 규모를 가늠하게 한다. 일본은행 통계를 보면, 2025년 1월부터 7월까지 외국은행 일본 지점에서 본국으로 송금한 월평균 금액은 12조7000억 엔(약 119조 원)으로, 2008년 이후 1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세계 자금이 일본을 떠나 해외 고금리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뚜렷한 신호다.

최근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크게 낮아진 점도 캐리 트레이드를 부추긴다. 시장이 안정되면서 투자자들은 환율 급변동 위험을 크게 걱정하지 않고 안정적인 금리 차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 미즈호증권의 오모리 쇼키 수석 데스크 스트래티지스트는 19일 보고서에서 "엔화가 안전자산에서 조달 통화로 바뀌면서 급격한 엔고나 달러 약세는 기대하기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엔화 매도를 부추기는 근본 문제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다. 일본의 실질금리는 물가 상승을 고려해도 -2.2%로 매우 낮다. 엔화를 보유하면 실질 가치가 되레 줄어드는 셈이다. 한 시중은행 외환 딜러는 "주요국 중 일본만이 실질금리가 심각한 마이너스"라며 "이는 경기 둔화와 물가 상승이 함께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있는 미국 달러와 더불어 엔화가 팔리는 가장 큰 이유"라고 짚었다.

안갯속에 빠진 정치도 엔화 가치에 부담을 준다. 지난 9월 초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사임과 뒤이은 자민당 총재 선거 등 정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한다. 현재 여당이 양원에서 모두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법안 처리를 위해 야당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야당은 적극적인 재정 확대를 요구하고 있어 차기 정권의 정책 지속성에 대한 의구심과 재정 건전성 악화 우려가 투자 불안을 키우고 있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의 우노 다이스케 수석 스트래티지스트는 "어떤 후보가 당선돼도 재정 확대를 주장하는 야당을 의식해 정권을 운영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최근 엔화 매도의 배경"이라고 말했다.

日銀의 '나 홀로 긴축', 엔저 막기엔 역부족


물론 엔화 매도 흐름에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추가로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는다. 실제로 일본은행은 통화정책 정상화에 나서 지난해 7월 기준금리를 0.25%로 올린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는 0.5%까지 인상했다.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엔화 약세의 큰 흐름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엔화 저평가 비판이나 중국 위안화 변동성 같은 세계 지정학 요인도 환율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쿠오카 파이낸셜 그룹의 사사키 토오루 수석 스트래티지스트는 "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 확대나 서비스 수지 악화를 뜻하는 디지털 적자 규모가 막대해 구조적으로 엔화를 팔려는 수요가 계속 나온다"며 "일본은행이 실질금리의 마이너스 폭을 획기적으로 줄일 정도의 큰 폭의 금리 인상을 단행하지 않는 한 엔화 약세 국면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순환적인 캐리 트레이드뿐 아니라 구조적인 매도 압력까지 더해지면서 엔화 가치가 당분간 오르기는 어려워 보인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