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자유주의 패권' 실패한 자리에 들어선 '값싼 현실주의'...침략 정당화 우려 "국경은 힘으로 바뀐다"는 잘못된 신호...한반도 안보 흔드는 '나쁜 선례' 될 수도
이미지 확대보기비슈케크에서 날아온 ‘평화 제스처’와 노골적 협박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열린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정상회의 후 회견장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은 서로 모순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로 묶인 두 메시지를 던졌다.
겉으로는 미국이 제안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평화안을 “진지하게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협상 의지를 강조했다. 그는 “미국 대표단이 다음 주 초 모스크바를 방문할 예정이며, 제네바에서 전달된 28개 조항짜리 평화안 초안은 향후 협상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푸틴은 전쟁 종식의 조건을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의 우크라군 철수로 못 박았다. “떠나지 않으면 군사력으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자유주의 패권의 오판이 부른 전쟁, 그리고 뒤늦은 ‘현실주의’ 흉내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침략으로 촉발됐지만, 그 배경에는 미국이 이끌어온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 전략의 구조적 오판이 자리 잡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워싱턴은 나토 동진을 통해 러시아를 점진적으로 포위하고,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사실상 상정하는 방식으로 러시아를 자유주의 질서 아래 편입시키는 ‘완전한 승리’를 꿈꿨다. 민주주의 확대와 규범 확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전략은, 모스크바의 안보 불안과 제국 상실의 트라우마를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 선택이었다.
푸틴은 소련 붕괴 이후 누적된 상실감과 포위 의식을 정치 자산으로 삼아 집권했고, 나토 동진에 맞서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해 왔다. 그럼에도 워싱턴의 자유주의 진영은 이를 “러시아 내부 정치용 레토릭” 정도로 치부했고, 그 결과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최악의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미국은 태도를 바꾸었는가. 표면상 트럼프식 평화안은 자유주의 패권의 ‘완전한 승리’ 대신 현실주의 세력균형론이 말하는 ‘제한된 승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포장된다. 그러나 실제 설계는 진정한 현실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진짜 현실주의라면, 러시아의 안보 불안을 자극하는 과도한 나토 동진과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추진은 조정하되, 그 전제 조건으로 러시아가 무력으로 탈취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반환하거나 최소한 반환의 로드맵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는 쪽에 가깝다.
지금 논의되는 트럼프식 구상은 정반대로 흐른다. 점령지는 그대로 인정하되, 나토 확대 문제는 모호한 “안보 보장”과 절충적 문구로 봉합하려 한다. 자유주의 패권의 실패를 교정하는 건강한 현실주의가 아니라, 침략의 결과를 기정사실화하는 ‘값싼 평화 현실주의’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근 국내 언론과 해외 언론이 쏟아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에 대한 모든 보도는 이 같은 관점을 누락하고 있다.
트럼프식 평화안: 전쟁 종식과 맞바꾼 영토 양보
영국 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의 전쟁 성과, 즉 크림반도와 기타 점령 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평화안을 설계하고 있다.
아직 문건 전체가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뼈대는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러시아가 실질적으로 장악한 지역을 기준으로 휴전선과 국경을 맞추고, 그 대가로 서방은 추가 제재 확대를 멈추거나 일부 제재를 완화한다.
푸틴은 이 문건을 “협상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크림과 돈바스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문제”가 미·러 협상의 핵심 의제임을 분명히 했다.
현실주의 세력균형 전략의 눈으로 보자면, 여기서 최소 두 가지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 첫째, 2014년 이후 러시아가 무력으로 점령한 크림·돈바스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영토는, 장기적 로드맵 아래 우크라이나로 반환하거나 최소한 국제적 조건과 절차가 명시된 잠정지위를 가져야 한다. 둘째, 나토 동진은 더 이상 러시아의 체제 불안을 건드리지 않는 수준으로 조정하되, 그 대신 “침략으로 얻은 영토는 국제적으로 합법화될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식 평화안에는 이 두 축이 모두 빠져 있다. 영토 반환은 사실상 포기되고, 나토 동진 문제는 러시아 안보 우려를 어느 정도 감안하는 수준의 모호한 합의로 밀어 넣을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의 안보 보장보다 러시아의 전리품 보장이 우선되는 구조다. 자유주의 패권의 오만이 부른 전쟁을, 잘못된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덮으려는 셈이다.
1945년 이후 금기였던 ‘힘에 의한 국경 변경’의 귀환
문제는 단순한 영토 조정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안보 질서의 토대는 “무력으로 국경을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냉전과 유고슬라비아 해체의 비극적 전쟁조차, 최소한 폭력보다 협정과 국민투표를 앞세운 경계 재조정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크림병합, 돈바스의 ‘독립 선언’, 2022년의 전면 침공은 이미 이 금기를 시험해 왔다. 여기에 미국 대통령이 점령지 현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평화안을 공식화한다면, 국제 규범 질서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
침략의 대가를 협상이 보장하는 선례가 만들어지면, 전쟁을 통한 국경 변경은 더 이상 금기가 아니라 유효한 전략 옵션이 된다. 미국이 예외를 스스로 허용하는 순간, 유엔 헌장의 ‘무력에 의한 영토 획득 불인정’은 선언적 문구로 전락할 수 있다.
중국·이란·북한 같은 수정주의 국가들이 받는 신호도 뚜렷하다.
“충분한 힘과 버틸 체제만 있다면, 전쟁으로 얻은 것을 외교로 굳힐 수 있다.”
이는 다음 도발의 시간표를 앞당기는 초대장에 가깝다. 자유주의 패권이 만든 공백을, 건강한 현실주의가 아니라 ‘힘의 정치’가 채우는 구도다.
푸틴의 진짜 목표는 ‘전쟁 승리’가 아니라 ‘체제 보전’이다
푸틴이 협상을 말하면서 동시에 “우크라군이 떠나지 않으면 무력으로 밀어내겠다”고 위협하는 이유는 단순한 전선 관리가 아니다. 그의 핵심 목표는 러시아 권위주의 체제의 생존이다.
크림이나 돈바스를 잃는 순간, 그것은 군사적 패배를 넘어 푸틴 체제의 정당성 위기를 촉발하는 사건이 된다. 전쟁은 이미 “포위된 러시아를 지키는 투쟁”이라는 내러티브로 국내 정치의 접착제가 되었다. 그 전리품을 되돌려주는 것은 곧 체제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트럼프식 평화안은 푸틴에게 매우 매력적인 출구다.
전쟁을 통해 얻은 점령지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면 “역사적 승리”로 포장할 수 있고, 서방의 피로감과 분열을 활용해 제재 완화까지 얻어낼 수 있다.
푸틴이 말하는 평화는 결국 선택지를 강요하는 구조다.
“우리 요구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더 맞든가.”
그에게 평화는 전쟁보다 값싼 체제 유지 방식이고, 그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토양은 자유주의 패권의 오판과, 이를 바로잡지 못한 채 표층만 흉내 내는 미국 내부의 ‘가짜 현실주의’다.
피로감과 원칙 사이에서 흔들리는 유럽
유럽은 전쟁 4년 차에 접어들며 깊은 피로에 빠졌다.
에너지 가격 급등, 난민 유입, 방위비 증가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트럼프식 평화안은 바로 이 균열을 파고든다.
전쟁이 멈추면 에너지 시장이 안정되고, 군사비 부담은 줄어든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리가 전쟁을 끝냈다”는 정치적 성과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발트 3국, 폴란드, 북유럽 국가들은 다른 장면을 보고 있다.
오늘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양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허용한다면, 내일 자신들의 안보도 동일한 방식으로 거래될 수 있다는 공포다. 자유주의 패권이 낳은 나토 동진의 과잉과, 그 실패 위에서 침략의 전리품을 인정하려는 왜곡된 현실주의 사이에서 유럽은 ‘원칙’과 ‘피로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고 있다.
한반도로 건너온 신호: “동맹도, 패권도 결국 자기 이익을 택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이 사태에서 세 가지 냉정한 신호를 읽어야 한다.
첫째, 동맹의 조건부성이다.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끝까지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피로와 비용이 쌓이자 어느새 영토 양보 논리가 고개를 들었다. 제도화된 동맹, 화려한 수사와 별개로, 위기 순간 미국 대통령의 선택 기준은 결국 ‘미국의 이해’다. 자유주의 패권이든, 현실주의 세력균형이든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둘째, 북한과 중국이 이를 교과서처럼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핵·미사일 능력을 더 끌어올리고 국지 도발을 반복하며 미국의 피로를 키우면, 언젠가 “한반도 안정”이라는 이름의 현상 인정형 평화안이 등장할 수 있다고 계산할 수 있다.
중국은 대만해협·남중국해에서 “기정사실화 → 협상” 전략을 시험할 때 우크라이나 사례를 참고할 가능성이 크다.
셋째, 한국이 의존해 온 규범 질서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력 불사용과 국경 불가침 원칙은 한국이 냉전과 분단 속에서도 안정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안전망이었다. 이 원칙이 무너지면, 동맹이 버티고 있더라도 그 위를 받쳐주던 국제 질서는 한층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전략 과제: 잘못된 ‘평화 현실주의’와 거리를 둔 냉정한 현실주의
이제 한국은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스스로의 현실주의를 설계해야 한다.
무력에 의한 영토 변경은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을 한·미 정상 공동성명과 외교 문서에서 반복해 못 박아야 한다. 동시에 비공개 채널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북한·중국의 현상 변경을 묵인하는 딜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전달해야 한다.
동맹 억지력과 자주적 억지력의 이중 구조도 강화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례는 결국 최전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자국 군사력과 국민의 결기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켰다.
탄도미사일·방공·해상 억지력, 사이버·우주 방어, 핵·재래식 연계 억지체계 고도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동맹이 있으니 괜찮다”는 안이함을 버리고, 동맹과 무관하게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최소 억지 수준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은 또한 유럽–아시아 규범 연대의 적극적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우크라이나 재건 지원, 러시아–북한 무기 거래 차단, 동유럽·북유럽과의 안보 협의체 참여 등을 통해 “힘의 논리 속에서도 규범을 끝까지 지키려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실제 행동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패권의 과오를 비판하되, 그 빈자리를 수정주의 세력이 채우지 못하도록 막는 성숙한 현실주의를 선택해야 한다.
‘빨리 끝나는 전쟁’의 유혹과 우리가 치를 국제 질서의 대가
트럼프–푸틴식 평화안이 실제로 타결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전쟁을 빨리 끝내자는 유혹은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그 방식이 국제 질서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따라 우리가 치를 대가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넘겨주는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는 선택은, 단기적으로는 에너지 가격과 군사비를 낮출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이 “힘이 곧 권리”라는 메시지를 각인하는 순간, 다음 전쟁은 더 빨리, 더 가까운 곳에서 찾아올 수 있다.
자유주의 패권의 과잉과, 그 실패 위에서 등장한 조악한 ‘평화 현실주의’가 만나는 지점에서 국제 질서는 가장 위험한 형태의 불안정에 빠질 수 있다.
한반도는 바로 그 위험의 교차점 위에 서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어떤 선이 그어지고 어떤 선례가 남는지에 따라, 한국이 마주할 미래의 안보 환경도 달라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쟁의 종식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끝낼 것인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다. 그리고 한국은 이제 그 판단을 남의 싸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 전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주의 패권의 오만과 잘못된 현실주의의 유혹 사이에서,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제3의 현실주의다. 원칙을 분명히 지키되, 냉혹한 힘의 구조를 직시하며 스스로의 억지력과 외교 레버리지로 국가 이익을 지켜내는 전략 — 그것이 트럼프–푸틴 ‘우크라이나 딜’이 한국에 던지는 진짜 질문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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