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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데이터센터·트럼프가 밀어준다"... 북미 에너지기업, 파이프라인에 77조원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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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데이터센터·트럼프가 밀어준다"... 북미 에너지기업, 파이프라인에 77조원 투입

올해 투자액 530억 달러 '사상 최대'... 2015년 악몽 딛고 고성장 궤도
트럼프 '화석연료 부활'·AI 전력 수요 폭증이 쌍끌이 견인
주가는 유가 하락 여파로 '잠잠'... 전문가 "원유보다 천연가스 기업 옥석 가려야"
미국 지도 위에 텍사스, 루이지애나,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는 파이프라인. 이미지=제미나이3 제공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지도 위에 텍사스, 루이지애나,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는 파이프라인. 이미지=제미나이3 제공
북미 에너지 기업들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과 액화천연가스(LNG) 수출 확대를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파이프라인 건설에 나서고 있다. 과거 유가 폭락에 따른 배당 삭감 등 '트라우마'로 인해 투자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신중하지만, 업계는 강력한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는 평가다.

배런스는 2(현지시각) 북미 파이프라인 업계의 기록적인 투자 붐과 그에 따른 기회 및 위험 요인을 심층 보도했다.

역대급 '인프라 투자'2019년 호황기 넘어섰다


배런스가 인용한 웰스파고 데이터에 따르면, 북미 에너지 기업들은 올해 파이프라인 확장 프로젝트에 총 530억 달러(77조 원)를 투입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직전 호황기였던 2019년의 490억 달러(72조 원)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댈러스 소재 투자회사 웨스트우드 그룹(Westwood Group)의 파라그 상하니(Parag Sanghani)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북미 기업들이 네트워크 확장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는 텍사스와 루이지애나 해안으로 화석연료를 운송해 해외로 수출하거나, 급증하는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천연가스 공급망을 확충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심지어 지난 10년 동안 화석연료 인프라 투자가 거의 없었던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도 파이프라인 확장이 진행 중이다.

업계의 수익성 전망도 밝아졌다. 상하니 매니저는 "기존에는 파이프라인 기업들의 이익성장률을 4~6% 수준으로 예상했으나, 향후 몇 년간은 6~8%에 가까운 성장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트럼프 효과''AI 전력 수요'가 쌍끌이 견인


이번 파이프라인 붐의 핵심 동력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LNG 수출 확대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급증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적 지원이다.

우선 미국 킨더모건(Kinder Morgan)과 같은 대형 파이프라인 기업들은 유럽과 아시아로 향하는 LNG 터미널에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설비를 확충하고 있다. 킨더모건 측은 미국의 천연가스 수요가 2030년까지 하루 280억 입방피트(cubic feet)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올해 수준보다 25% 이상 늘어난 수치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화석연료 장려 정책이 불을 지폈다. 트럼프 행정부는 새로운 LNG 수출 터미널과 원유 수출 시설 승인을 신속하게 처리하며 업계의 확장을 돕고 있다.
AI 열풍에 따른 데이터센터 확장도 새로운 수익원이다. 에너지 트랜스퍼(Energy Transfer)는 오라클(Oracle)의 데이터센터 3곳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 중이며, 이 중 2곳은 텍사스에 있다. 오하이오에 본사를 둔 MPLX 등은 기업 인수를 통해 자본 지출 규모를 늘리고 있으며, 원오크(Oneok)는 덴버로 향하는 연료 파이프라인을 짓고 있다.

주가 괴리의 원인은 '과거의 공포'"옥석 가리기 필요"


기록적인 투자와 성장 전망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업들의 주가는 시장 수익률을 밑돌고 있다. '토터스 북미 파이프라인 펀드(Tortoise North American Pipeline Fund)'의 올해 수익률은 4%에 그쳐,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의 상승률 16%에 한참 못 미쳤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2015년의 '학습 효과'를 꼽는다. 당시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면서 무리하게 몸집을 불렸던 파이프라인 기업들이 줄줄이 배당을 삭감했고,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봤다. 롭 썸멜(Rob Thummel) 토터스 캐피털 시니어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올해 유가가 15% 하락한 점이 파이프라인 주가에 가장 큰 하방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내년에도 유가 약세가 예상되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사이클은 과거와 다르다고 평가한다. 상하니 매니저는 "현재 기업들은 2015년과 달리 배당금을 방어할 수 있는 충분한 현금 흐름을 확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종목별 차별화는 뚜렷하다. 천연가스와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 사업을 병행하는 윌리엄스 컴퍼니스(Williams Cos.) 주가는 올해 10% 상승한 반면, 원유와 천연가스 시장을 모두 다루는 에너지 트랜스퍼는 15% 하락했다.

상하니 매니저는 "지난 10월 상당한 조정을 거친 지금이 이 분야에 자산을 배분하기 좋은 시기"라며 "원유나 기타 액체 연료를 운송하는 기업보다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기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AI가 쏘아 올린 '에너지 인프라', 한국 기업엔 '낙수효과'


미국발() 파이프라인 건설 붐은 단순한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 산업계와 투자자에게는 명확한 '기회'이자 '시그널'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호황이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강관, 전력기기, 조선업에 강력한 낙수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분석한다.

우선 '슈퍼 사이클'에 올라탄 기자재 기업의 수혜가 예상된다. 미국 내 가스관 확장은 곧 고강도 강관(Steel Pipe) 수요 폭증을 의미한다. 세아제강 등 북미 에너지용 강관 시장에서 이미 품질 경쟁력을 입증한 국내 철강사들에겐 직접적인 호재다. 또한, 데이터센터 전력망 확충은 필수적으로 변압기와 전선 수요를 동반한다.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등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이 미국 현지에서 잇달아 수주 잭팟을 터뜨리는 배경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조선업의 '수주 곳간'도 더욱 넉넉해질 전망이다. 미국 내 LNG 수출 터미널 확장은 결국 이를 실어 나를 LNG 운반선 발주로 이어진다. 이는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을 장악한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등 한국 조선업계의 장기적인 먹거리를 보장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투자자 관점에서도 전략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AI 투자의 범위가 반도체라는 '하드웨어'를 넘어 이를 가동할 '에너지 인프라'로 확장하고 있다""투자자들은 엔비디아 같은 빅테크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고배당 매력이 돋보이는 미국 미드스트림(운송·저장) 기업이나 이들과 공급망으로 묶인 국내 밸류체인 기업으로 시야를 넓혀야 할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