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신뢰가 흔들리고 회색 지대 전쟁이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압박하는 가운데 한국은 안보와 경제 모두에서 새로운 생존 전략을 요구받고 있다.
트럼프 미 행정부의 대러 유화 접근이 가져올 국제 질서의 변화를 정밀하게 읽고 대응해야 할 때다.
트럼프 미 행정부의 대러 유화 접근이 가져올 국제 질서의 변화를 정밀하게 읽고 대응해야 할 때다.
이미지 확대보기이에 본지는 일본의 닛케이 아시아가 12월6일 보도한 내용을 바탕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대러 유화와 그로 인해 초래되는 동맹 안정과 국제 질서 상의 위험을 한국의 안보와 경제와 관련한 함의를 재구성하면서 아래와 같이 긴급 분석했다.
동맹의 신뢰가 무너질 때 생기는 전략 공백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제시한 초안은 영토 양보와 군사력 축소, 북대서양조약기구 포기를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항복에 가까운 조건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개입해 최악의 문구들은 일부 정리했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대로 남았다. 미국 대통령이 동맹의 생존 문제를 국제 규범과 연대의 원칙이 아니라 강대국 간 거래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강대국이 무력 침공을 통해 국경선을 다시 그어도, 협상 테이블에서 일정 부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국제 질서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이것은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에서의 영토 분쟁, 해양 경계, 대만 해협 문제까지 모두 새로운 위험 계산 속으로 들어간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 흐름은 한미 동맹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점검하게 만든다. 동맹이 규범과 원칙 위에 서 있을 때 한국은 그 틀 안에서 중장기 전략을 설계할 수 있지만, 동맹이 특정 지도자의 거래 감각에 좌우되기 시작하면, 한국은 언제든 협상 카드로 취급될 수 있는 구조적 취약성에 노출된다.
유럽에서 이미 진행 중인 회색 지대 전쟁
닛케이 보도가 생생하게 보여주듯 유럽은 이미 새로운 전쟁 양식을 몸으로 겪고 있다. 러시아는 정규전이 아니라 군사와 정보, 사이버와 테러, 에너지와 물류를 결합한 회색 지대 전술로 발트 삼국과 폴란드, 북유럽을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드론과 기구를 이용한 영공 침범, 해저 통신망과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파괴 공작, 철도와 물류 거점을 겨냥한 방화와 폭발물 설치, 공항 폐쇄가 반복되는 일상적 공포는 단지 물리적 피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피로와 불신을 누적시키는 전략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선거를 겨냥한 장기 심리전이기도 하다.
이때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에 대해 중립적 관찰자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침략의 대가를 사실상 승인하는 듯한 협상안을 내놓는다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더 공격적인 회색 지대 작전을 감행해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회색 지대 전술은 아시아에서 이미 다른 얼굴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서 시험 중인 회색 지대 전술은 이미 아시아에서 다른 얼굴을 하고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동중국해와 서해, 남중국해에서의 행동은 전형적이다. 군사 훈련과 해경 선박, 민병대 어선을 섞어 보낸 뒤, 일정 수위를 넘지 않는 압박을 장기간 유지하면서 상대국의 인내와 대응 체계를 시험한다.
일본 총리의 발언 한마디, 대만 관련 선언 한 줄에 중국은 군사 훈련, 경제 보복, 외교적 냉각을 동시에 동원한다. 이런 패턴이 누적되면 동맹국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과연 미국은 이 상황에서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트럼프 대통령의 대러 유화는 중국에게 중요한 전략적 신호를 준다. 미국이 러시아의 침략에 대해 원칙보다 거래를 중시한다면, 동아시아에서도 동맹의 안보보다 미중 간 큰 틀의 거래를 우선할 수 있다는 의심이 커진다. 중국 지도부는 이 신호를 세밀하게 읽고 행동의 범위를 조정할 것이다. 이는 곧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대만, 동남아 안보 환경 전반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한국의 안보만이 아니라 경제와 금융 시장도 영향을 받는다
대부분의 논의는 안보에 집중되지만, 이 변화는 한국 경제와 금융 시장에도 직접적인 파급 효과를 가진다.
우선, 회색 지대 전술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강화되면, 글로벌 해상 운송과 에너지 공급망의 위험 프리미엄이 상승한다. 원유와 가스, 곡물과 주요 원자재를 수입해 제조업과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게 이는 곧 비용 상승과 공급망 불안정으로 직결된다.
둘째, 미국의 신뢰도 약화는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위험 자산에 대한 경계심을 높인다. 미국이 동맹의 안보를 확실히 지키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지정학적 리스크 프리미엄이 높아지고, 한국과 같은 주변부 시장의 통화와 채권, 주식은 변동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셋째,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는 국면마다 한국의 수출 기업은 환율 급등과 금융 비용 증가라는 이중의 충격을 받는다. 투자자 입장에서 한국은 더 이상 안정된 제조 허브가 아니라, 미·중 경쟁과 북핵 위기가 교차하는 하이 리스크 지역으로 분류될 위험이 있다.
이 모든 요인은 장기적으로 한국의 성장 잠재력과 국가 신용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안보 리스크가 금융 비용을 올리고, 금융 비용 상승이 투자 위축과 고용 감소로 이어지는 구조적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전략: 동맹 신뢰를 강화하면서도 전략 자율성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미국과 거리를 두거나, 현실주의 명분 아래 강대국 거래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첫째, 한국은 동맹의 내용을 단순한 군사 협력에서 민주주의와 국제 규범, 영토 보전의 원칙을 공유하는 가치 동맹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어느 행정부이든 이 가치를 쉽게 거래할 수 없도록, 동맹의 문서와 제도, 공동 선언에 이런 원칙을 더 강하게 새겨넣어야 한다.
둘째, 한국은 미국과의 양자 관계뿐 아니라 유럽과 일본, 호주 등과의 안보 및 경제 협력을 입체적으로 강화해 다층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의 회색 지대 전술에 대응하려면 정보 공유, 사이버 안보, 해저 인프라 보호 같은 새로운 영역에서의 연합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
셋째, 경제 측면에서는 지정학적 충격에 견딜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수출 시장과 공급망, 자금 조달 통화와 투자자 기반을 더 다변화해 어느 한 지역의 긴장이 한국 경제 전체를 뒤흔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넷째, 무엇보다도 한국 내부의 전략적 합의가 필요하다. 북한 핵과 중국의 부상, 미국의 전략 변화라는 삼중의 압력 속에서 한국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국가 이익이 무엇인지, 그 이익을 위해 어디까지 비용을 감수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토론과 정치적 합의가 요구된다.
강대국의 유화는 평화를 주지 않는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이 한 발 물러나는 순간 이를 기회로 해석하며 영향권 확대를 시도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유화적 본능은 평화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갈등의 공간을 넓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 이 논쟁은 먼 대륙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에서 실험 중인 회색 지대 전술은 언젠가 동북아에서 더 거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미국이 규범과 동맹의 편에 확고히 서지 않을 경우, 가장 먼저 시험대에 오르는 나라는 바로 전선과 후방이 겹쳐 있는 한국일 것이다.
세계는 지금 강대국 협상의 시대가 아니라 동맹 신뢰의 시대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이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전략 언어로 미국과 세계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것인지가 앞으로의 국익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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