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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블랙홀이 다 삼켰다”… D램값 55% 폭등, PC·가전 가격 ‘줄인상’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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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블랙홀이 다 삼켰다”… D램값 55% 폭등, PC·가전 가격 ‘줄인상’ 공포

삼성·SK·마이크론 ‘HBM 올인’에 일반 D램 생산 급감… ‘대(大) 메모리 피벗’ 가속화
삼성 노태문 사장 “TV·가전까지 전방위 타격… 공급 부족 2027년까지 갈 것”
“저렴한 메모리 시대 끝났다”… 전자제품 가격 최대 20% 상승, ‘AI 인플레이션’ 현실화
메모리 모듈과 두 개의 삼성 K4RAH08 칩이 표시되어 있다. 사진=삼성이미지 확대보기
메모리 모듈과 두 개의 삼성 K4RAH08 칩이 표시되어 있다. 사진=삼성
인공지능(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빅테크 기업들의 무한 경쟁이 반도체 웨이퍼(원판)를 독식하면서 PC와 스마트폰 등 일반 소비자용 전자제품 시장이 극심한 ‘메모리 가뭄’과 가격 폭등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EE타임스와 IT 매체 Wccf테크는 5일(현지 시각)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AI 중심의 고부가가치 시장과 공급 부족에 시달리는 소비자 시장으로 양분되는 ‘대(大) 메모리 피벗(The Great Memory Pivot)’ 현상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제조사가 수익성이 월등한 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주력하면서 일반 D램 공급이 줄어들었고, 이 탓에 올해 초 D램 가격이 최대 55%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웨이퍼 잠식한 HBM…‘슈퍼사이클’의 그늘


EE타임스 분석에 따르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는 물량 공세보다 수익성을 우선시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이는 AI 붐이 촉발한 이른바 ‘슈퍼사이클’이다.

문제는 한정된 생산 능력이다. 업계 데이터에 따르면 최신 HBM3E는 표준 DDR5보다 웨이퍼 공간을 약 3배 더 많이 차지한다. 칩 크기가 커진 데다 수직 적층 공정 난도로 인해 생산 수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IDC의 분석가들은 “엔비디아 GPU용 HBM 생산에 웨이퍼 한 장을 투입할 때마다 스마트폰용 LPDDR5X나 PC용 SSD를 만들 웨이퍼가 그만큼 사라지는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메모리 제조사 입장에서 이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현재 첨단 서버급 DDR5 모듈의 수익률은 75%에 이른다. 마이크론은 올해 2분기 총이익률이 68%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PC용 메모리 모듈은 마진이 박하다. 3사가 올해 HBM 생산 능력을 사실상 완판한 배경이다.

삼성 노태문 사장 “가전도 예외 없다”…2027년까지 공급난


메모리 공급 부족의 충격파는 스마트폰을 넘어 가전 전반으로 확산했다. 노태문 삼성전자 MX사업부장(사장)은 “메모리 부족 사태에서 자유로운 기업은 없다”면서 “휴대전화뿐만 아니라 TV와 생활 가전 등 모든 소비자 제품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 사장은 “부품 가격 급등에 따른 완제품 가격 인상은 불가피하다”며 이번 공급난이 단기간에 그치지 않고 2027년 이후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메모리 제조사들이 생산 라인을 증설하더라도 신규 물량 대부분이 AI 분야로 빨려 들어갈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델(Dell) 테크놀로지스와 레노버 등 글로벌 PC 제조사 임원들도 잇달아 경고음을 냈다. 제프 클라크 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부품 비용 상승 속도가 전례 없는 수준이라고 토로했고, 윈스턴 청 레노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핵심 부품 비축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러한 재고 확보 경쟁은 가격 상승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AI PC의 역설’과 소비자 물가 상승


업계는 이번 사태를 ‘AI PC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PC 제조사들은 온디바이스 AI(기기 내 AI 구동)를 앞세워 침체한 PC 시장을 되살리려고 하지만, 정작 AI 구동에 필수적인 고용량 메모리(16~32GB)를 확보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공급망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초 평균 D램 가격은 50~55% 급등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제조사들이 비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전가하면서 소비자 전자제품 가격은 최대 20%까지 오를 것으로 보인다.

IDC는 비싼 부품 가격 탓에 ‘AI PC’의 진입 장벽이 높아져 2026년 PC 출하량이 오히려 9% 뒷걸음질할 것으로 예측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가격을 유지하는 대신 메모리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현상이 나타날 조짐도 보인다.

지정학적 긴장과 ‘AI 세금’의 시대


공급 부족을 틈타 지정학적 셈법도 복잡해졌다. 미국 마이크론은 자체 공장 가동률이 한계에 이르자 대만 파운드리 업체 PSMC와 위탁 생산 협상을 벌이고 있다.

중국 기업들의 ‘사재기’도 변수다. 틱톡의 모기업 바이트댄스는 규제 강화를 우려해 올해 AI 인프라에 230억 달러(약 33조2600억 원)를 쏟아부어 칩을 쓸어 담을 계획이다. 중국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CXMT)는 구형 공정(레거시) 메모리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42억 달러(약 6조 원) 규모의 상장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소비자들이 저렴하고 풍부한 메모리를 누리던 시대는 끝났다”고 입을 모은다. 데이터센터에 더 많은 실리콘이 들어갈수록 개인 기기 가격은 비싸지는 구조가 고착화됐다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구독료뿐만 아니라 하드웨어 구입 비용에도 사실상 ‘AI 세금’이 부과된 셈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