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하루 2400만 배럴 생산 세계 1위…희토류까지 자원 전체를 패권 무기로
중국·이란·러시아 에너지 조달 동시 차단 노리지만, 호르무즈 봉쇄에 유가 120달러 돌파
중국·이란·러시아 에너지 조달 동시 차단 노리지만, 호르무즈 봉쇄에 유가 120달러 돌파
이미지 확대보기국제에너지기구(IEA) 파티 비롤 사무총장은 지난 23일(현지시각) 호주 국립 프레스클럽에서 "중동 9개국 40개 이상의 에너지 시설이 심각하게 파괴됐다"며 "이번 사태는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과 2022년 가스 위기를 합친 것과 맞먹는 충격"이라고 말했다. 호르무즈 해협 재개통이 "현재로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해결책"이라는 IEA의 경고다.
바로 이 역설 안에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에너지 도미넌스(Energy Dominance·에너지 패권)' 전략의 실체와 한계가 동시에 담겨 있다. 채텀하우스(Chatham House·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미 외교관계협회(CFR), 세계경제포럼(WEF)이 최근 잇달아 내놓은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이 전략의 구조와 파장을 해부한다.
"파라, 파라, 더 파라"…자원을 패권의 총알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당일인 지난해 1월 20일 '미국 에너지 해방'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연방 공유지에서의 석유·가스·석탄 생산을 가로막던 규제를 한꺼번에 폐지하고, 광물 채굴 허가 절차도 대폭 줄였다.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파라, 파라, 더 파라)"이 국가 전략의 슬로건이 됐다.
결과는 숫자로 증명됐다. 미 에너지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1360만 배럴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석유·액체연료 총 생산량은 하루 2400만 배럴로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합친 것보다 많다. 천연가스 생산량은 하루 1100억 입방피트로 러시아·이란·중국의 합산 생산량에 육박한다. LNG(액화천연가스) 수출량은 사상 처음으로 연간 1억 미터톤을 돌파했다. 시추 허가도 전년보다 55% 늘어난 약 6000건이 승인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생산력을 단순한 경제 지표가 아닌 지정학 무기로 본다. 러시아·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전통 에너지 강국의 영향력을 꺾고, '페트로 달러' 체계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며, 에너지 가격 통제권을 손에 쥐어 중국의 패권 도전을 억누르겠다는 구상이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층에게 이 전략은 제조업 일자리 창출, 에너지 비용 인하, 중국에 빼앗긴 글로벌 주도권 회복이라는 세 가지 명분을 동시에 충족하는 핵심 의제다.
석유·가스에서 희토류·우라늄까지…'자원 전선' 확장
에너지 패권 전략은 화석연료에서 핵심광물 전 영역으로 넓어졌다. 중국이 전 세계 희토류 채굴의 60%, 정제 처리 능력의 90% 이상을 틀어쥐고 있다는 현실(IEA 자료)이 미국을 자극했다. 중국은 미국의 관세 부과와 기술 수출 제한에 희토류 수출 통제로 맞섰다.
베네수엘라와 그린란드를 노리는 논리도 같은 맥락이다. 올해 1월 마두로 대통령 생포 직후 하워드 루트닉 미 상무장관은 "베네수엘라에는 철강과 모든 핵심광물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되살릴 것"이라고 말했다. CSIS는 "그린란드에는 EU가 핵심으로 분류한 30개 광물 가운데 25개가 매장돼 있으며, 미국은 이곳을 핵심광물 공급망과 북극 군사 거점을 동시에 확보할 기회로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자원 전략 성격이 더 노골적이다. 중국은 2025년 기준 하루 47만 배럴의 베네수엘라 원유를 수입했고, 베네수엘라 석유 부문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왔다. 미국이 그 생산을 장악하면 중국이 저가 원유를 확보하는 주요 창구가 막힌다. 시카고 국제문제협회(Chicago Council on Global Affairs)는 "미국의 베네수엘라 개입은 민주주의 회복이 목적이 아니다. 중국·쿠바·러시아·이란이 마두로 정권 아래서 누리던 혜택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동맹도 냉담…유럽 "도미넌스 전략은 지정학적 함정"
트럼프 행정부가 에너지 패권을 앞세워 동맹국을 압박하는 방식에 반발도 거세다.
채텀하우스는 올해 2월 보고서에서 "EU·일본·한국은 미국산 에너지 구매를 약속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독자적 에너지 다변화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이 미국산 LNG를 사면서도 카타르산 가스, 한국·프랑스 원전 기술을 섞어 쓰는 방식으로 미국 의존을 제한하고 있다는 뜻이다.
유럽 외교정책위원회(ECFR)는 지난해 12월 보고서에서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NSS)은 유럽을 '문명적 쇠퇴 위기'에 처한 약자로 묘사하며 에너지를 거래 수단으로 삼는다"며 "이는 유럽을 지정학적 함정에 빠뜨리는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유럽연합(EU) 의장 안토니우 코스타와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트럼프의 NSS 일부 내용을 "용납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미국 내에서도 반응이 엇갈린다. 알 자지라가 인용한 미국자동차협회(AAA) 자료에 따르면, 이란 전쟁 개전 이후 미국 내 휘발유 평균 소매가격이 갤런당 3.41달러(약 5070원)로 1주일 만에 0.43달러 올랐다. 에너지 패권 전략의 핵심 약속이었던 저렴한 에너지 비용이 오히려 역주행하는 상황이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지난해 12월 NSS 분석 보고서에서 "이 전략은 표면적으로 '자제'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미국 우위와 패권을 더 공격적으로 추구하는 모순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백악관·마가 진영 "전쟁의 진통은 새 질서의 대가"
비판 일색의 외부 시각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와 마가(MAGA) 진영은 이란 전쟁 상황조차 에너지 패권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로 읽는다.
백악관은 올해 2월 공식 성명에서 "미국은 지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에너지 패권 국가"라며 "LNG 수출 사상 첫 연간 1억 미터톤 달성, 연방 공유지 시추 허가 55% 증가 등 취임 1년의 성과가 이를 입증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전쟁 초기 유가 급등 국면에서 "유가가 오르면 오르는 것(If they rise, they rise)"이라며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에너지 전문가 래리 베런스는 지난 12일 워싱턴 타임스 기고에서 "2022년 바이든 행정부 때는 유가 충격이 수개월간 지속됐지만, 이번엔 미국의 압도적 생산력 덕분에 급등 뒤 빠른 하락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에너지는 무기다. 트럼프는 이를 지갑을 지키고 적을 압박하는 도구로 정확히 사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가 진영의 논리는 더 나아간다. 이 전략을 지지하는 측은 호르무즈 봉쇄와 유가 급등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을 "미국 주도 새 에너지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진통"으로 규정한다. 미 에너지부는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 선포 이후 진행한 47개 규제 폐지가 연간 110억 달러(약 16조3700억 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냈다고 밝혔다. 트럼프 지지 진영에서는 미국이 러시아산·이란산 에너지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중동 전쟁에서도 OPEC에 손을 벌리지 않고 독자 대응이 가능하다는 점을 핵심 성과로 내세운다. 채텀하우스조차 "미국이 캐나다에서 베네수엘라까지 글로벌 원유 생산의 약 20%에 직·간접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사실"이라며 "이것이 트럼프 행정부에 어느 정도의 외교적 행동 자유도를 부여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전략 지지 진영 안에서도 이란 전쟁 장기화에 따른 유가 폭등이 미국 국내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부담을 주고 있다는 점은 정치적 딜레마로 부상하고 있다. 알 자지라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에너지 비용에 민감한 유권자들이 외국 전쟁에 부정적이라는 점이 트럼프 행정부에 정치적 취약점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란 전쟁 3주째…전략의 역설이 현실이 됐다
전략의 한계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시작된 뒤 이란은 3월 4일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했다. 해협을 통과하는 하루 2000만 배럴 이상의 원유 흐름이 멈췄다. CFR 선임연구원 브래드 W. 세서는 지난 23일 보고서에서 "호르무즈 해협 교통이 재개되지 않는 한 에너지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미국에는 두 가지 선택만 있다. 이란에 양보하며 협상하거나, 더 깊이 전쟁으로 들어가거나"라고 밝혔다.
CSIS는 같은 날 분석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라스 타누라 정유시설, 카타르 라스 라판 가스 거점, 아랍에미리트(UAE) 루웨이스 정유시설 등 걸프 지역 주요 시설이 타격을 받아 3월 현재 걸프산 원유 생산량이 1년 전보다 하루 1000만 배럴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국제 기준 브렌트유 가격은 3월 6일 배럴당 92달러(약 13만6900원)를 넘어섰고, 이후 120달러(약 17만8600원)를 웃도는 상황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이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번 전쟁의 경제적 파장은 에너지에서 시작해 인플레이션·산업 비용·식량 안보로 번지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무역로·투자 결정·정치 안정까지 흔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에 대한 타격 효과도 예상과 엇갈린다. 채텀하우스 분석에 따르면 이란은 걸프 국가들의 선박은 막으면서 중국행 자국 원유는 해협을 통해 계속 수출하고 있다. 에너지 패권 전략이 중국의 에너지 조달을 차단하려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란이 중국에만 원유 수출 통로를 열어주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채텀하우스는 "갈등이 몇 달 지속될 경우 유가는 배럴당 130달러(약 19만3500원) 수준까지 오를 수 있으며, 중국은 전략 비축유와 해상운임 조정 능력 덕분에 단기 충격을 어느 정도 버텨낼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략 자체에 대한 종합 평가는 가혹하다. IEA 비롤 사무총장은 23일 "호르무즈는 전 세계 원유 해상 운송의 4분의 1, LNG 운송의 5분의 1이 지나는 길목"이라며 "이 해협의 봉쇄는 에너지뿐 아니라 석유화학·비료·헬륨 등 글로벌 경제의 모든 동맥을 끊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스스로 글로벌 에너지 공급의 20%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지만, 정작 그 에너지가 집중된 중동의 일촉즉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역설이다.
채텀하우스는 결론적으로 "에너지 시장은 지정학을 깔끔하게 따르지 않는다. 미국의 에너지 패권 전략은 중장기적으로 오히려 중국의 친환경 기술 패권을 강화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