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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금·보험사도 물렸다… 1517조 '그림자 금융' 균열, 한국까지 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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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금·보험사도 물렸다… 1517조 '그림자 금융' 균열, 한국까지 번지나

국내 기관투자자, 글로벌 사모대출 펀드에 수조 원 묶여… 환매 제한 현실화 시 직격탄
IMF·BIS도 경고한 비은행 신용 팽창… 부실, 공식 통계보다 훨씬 깊다
월가 벌처 펀드, 18년 만의 '역발상 베팅' 본격화… AI 충격이 위기 증폭
미국 기업 5곳 중 1곳이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처지에 몰렸다. 수면 아래에는 더 큰 부실이 켜켜이 쌓이고 있다. 고금리의 장기화와 인공지능(AI) 혁명이 맞물리며 사모대출 시장이 흔들리는 지금, 월가의 '벌처 펀드(부실채권 전문 펀드)'들은 18년 만의 최대 기회를 낚아채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기업 5곳 중 1곳이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처지에 몰렸다. 수면 아래에는 더 큰 부실이 켜켜이 쌓이고 있다. 고금리의 장기화와 인공지능(AI) 혁명이 맞물리며 사모대출 시장이 흔들리는 지금, 월가의 '벌처 펀드(부실채권 전문 펀드)'들은 18년 만의 최대 기회를 낚아채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
국민연금과 주요 공제회, 대형 보험사들이 지난 수년간 공들여 담아 온 글로벌 사모대출 펀드가 흔들리고 있다. 고금리의 장기화와 AI 혁명이 겹치며 약 1조 달러(1517조 원) 규모의 사모대출 시장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고,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블랙스톤·아레스 등 월가 대형 운용사의 일부 펀드에서는 이미 수십억 달러 규모의 환매 요청이 쏟아졌다. 한국의 기관투자자들이 담은 '대체투자 바구니'에도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결제은행(BIS)이 수차례 팽창 리스크를 경고해 온 비은행 신용 시장, 이른바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의 균열이 이제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30(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글로벌 부실채권 투자자들은 이 균열을 18년 만의 최대 수익 기회로 읽고 대규모 자금 집행을 서두르고 있다. 월가에서 '벌처 펀드(부실채권 전문 펀드)'로 불리는 이들이 공격적으로 움직일수록, 반대편에 선 기관투자자들의 손실 위험도 함께 커진다.

2008년 금융위기 vs 2026년 사모대출 위기 비교.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2008년 금융위기 vs 2026년 사모대출 위기 비교. 도표=글로벌이코노믹


"신이 내린 기회"… 벌처 펀드의 귀환

이 시장의 논리는 단순하다. 남이 팔 때 사고, 남이 두려워할 때 탐욕을 발휘하라는 것이다. 210억 달러(31조 원) 규모 자산을 운용하는 스트래티직 밸류 파트너스(SVP)의 빅터 코슬라 창립자는 FT와의 인터뷰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기회가 왔다"고 단언했다. 마블게이트 자산운용의 앤드루 밀그램 창립자도 "내 생애 이보다 더 나은 기회는 없었다"며 신규 펀드 조성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이들이 눈독 들이는 먹잇감은 지난 10년간 은행권의 대출 공백을 메우며 급성장한 사모대출 시장이다. 기업공개(IPO)나 회사채 발행 대신 사모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해 온 중소·중견 기업들은 이제 고금리와 실적 악화라는 이중 압박에 신음하고 있다. 소나 자산운용의 존 아일워드 창립자는 "자금 유출이 한계에 달해 강제 매각 물량이 시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이는 투자자들에게 상당한 수익 기회를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부실채권 투자의 핵심 리스크 Top 3.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부실채권 투자의 핵심 리스크 Top 3. 도표=글로벌이코노믹


2008년과 다른 점 → 이번엔 더 늦고, 더 길 수 있다


이번 위기를 2008년 금융위기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위험하다.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2008년 위기의 진원지는 은행이었다. 부실은 즉각 표면에 드러났고, 시장의 가격 수정도 빠르게 진행됐다. 반면 이번 위기는 투명성이 낮은 비은행 사모대출 시장, 이른바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에서 배태되고 있다. 사적 계약 기반이다 보니 자산 가치는 시가(時價)가 아닌 모델 추정치로 평가되고, 부실 인식은 의도적으로 지연된다. 결과적으로 이번 충격은 더 늦게 드러나고, 더 길게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미 기업 5곳 중 1"이자도 못 내"… 숨겨진 부도율의 실체


표면에 드러난 통계보다 실제 기업들의 체력은 훨씬 더 심각하게 악화돼 있다. 신용 투자사 데이비드슨 켐프너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레버리지론(고위험 기업 대출) 시장에서 이자 보상 배율(영업이익 대비 이자 비용 비율)이 위험 수준 이하로 떨어진 기업 비중이 2019년 이후 두 배 이상 증가해 전체의 20%에 달한다. 버는 돈으로 이자를 제때 내기조차 어려운 기업이 다섯 곳 중 하나라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공식 부도율 통계가 이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숨은 신용위기' 구간이다. 상당수 차입 기업이 이자를 현금 대신 추가 부채로 갚는 이자 자본화(PIK·Payment In Kind) 방식을 택하거나, 금융 기관과 협의해 대출 만기를 연장(Amend & Extend)하며 버티고 있다. 겉으로는 부도가 나지 않지만, 현금 흐름은 사실상 파산 상태인 이른바 '연명 기업(Zombie Firm)'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현장의 경고가 잇따른다.

마블게이트의 밀그램 대표는 FT"대형 지역은행의 구조조정 담당 임원으로부터 사모펀드들이 포트폴리오 기업을 포기하고 경영권을 넘기는 속도가 놀라울 만큼 빠르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는 공식 지표에는 잡히지 않는 현장의 부실 속도를 방증한다.

벌처 펀드가 돈 버는 구조 → 단순 헐값 매입이 아니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단순히 싸진 채권을 사들이는 수준이 아니다. 부실채권 투자의 진정한 수익 메커니즘은 '채권자에서 기업 지배자로' 올라서는 구조에 있다.

강제 매각(Forced Selling)이 발생하면 시장에는 유동성 프리미엄이 확대된 저평가 자산이 쏟아진다. 벌처 펀드들은 이를 헐값에 매입해 채권자 지위를 확보한다. 이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채권을 지분으로 전환(Debt-to-Equity Swap)하고, 구조조정이 완료된 기업의 가치 재평가(Re-rating)를 통해 막대한 차익을 실현한다. 킹스트리트 자산운용의 데이비드 월치 파트너가 "현재의 부실 규모가 시장에 풀린 가용 자금을 압도할 것"이라고 전망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AI의 역설 → 소프트웨어 산업 수익 구조 자체를 흔들다


이번 위기의 독특한 국면은 기술 혁명이 위기를 증폭시킨다는 점이다. 그동안 사모대출 시장의 최우량 고객으로 분류되던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 앞에서 경쟁 우위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핵심은 단순한 비용 절감 문제가 아니다.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가치는 본래 미래 현금 흐름에 대한 높은 기대, 즉 경쟁자가 쉽게 진입하기 어려운 초과이익 구조에 기반한다. AI가 이 진입 장벽을 무너뜨리면 가격 결정력(Pricing Power)이 떨어지고, EBITDA(세전 이익)가 꺼지며, 레버리지 구조 전체가 흔들린다. AI는 그 자체로 소프트웨어 산업의 초과이익 구조를 해체하는 디플레이션 충격인 것이다.

SVP의 코슬라 대표는 소프트웨어 부문을 정밀 분석하기 위한 전담팀을 구성한 뒤 "누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될지 단정하기 이른 시점이지만,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며 현금 비중을 높이고 기회를 관망 중임을 밝혔다.

벌처 펀드의 아킬레스건


물론 반대 시각도 존재한다. 대형 사모펀드의 한 고위 임원은 FT"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은행의 신용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시장에 공포를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벌처 펀드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려 한다는 시각이다.

더 실질적인 위험은 금리 인하 속도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벌처 펀드들의 최대 리스크는 경기 침체 심화가 아니라 예상보다 빠른 기준금리 인하다. 금리가 내려가면 한계 기업들도 재금융(Refinancing)에 성공할 수 있고, 강제 매각 압력이 줄어들며 부실 자산 매입 기회 자체가 소멸한다. 이들의 투자 전제인 '고금리 장기화'가 흔들리는 순간, 공들여 조성한 펀드의 기회 비용이 급격히 커질 수 있다.

또한, 현재 상황은 2008년처럼 금융 시스템 전체가 붕괴되는 시나리오와는 다르다. 이번 위기의 본질은 비은행 신용 시장 내부의 대규모 자산 재가격(Repricing) 과정에 가깝다. 공황이 아닌 조정이라는 뜻이다.

한국 금융시장에 울리는 경고음


이 흐름은 한국 자본시장과 무관하지 않다. 국내 대형 보험사·연기금·공제회는 지난 수년간 글로벌 사모대출 펀드에 상당 규모를 투자해 왔다. 해당 펀드들에서 환매 제한이나 가치 하락이 현실화될 경우 국내 기관 투자자들의 대체투자 포트폴리오에 직접적인 타격이 올 수 있다.

아울러, 사모대출 시장 불안이 장기화될수록 국내 중소·중견 기업의 해외 자금 조달 비용도 상승 압박을 받는다. 글로벌 신용 공급이 줄어들면 그 여파는 결국 국내 기업 금융 환경 전반으로 퍼진다. 국내 금융 당국도 이 흐름을 단순한 해외 시장 이슈로 방치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편 국내 부실채권(NPL) 운용사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릴 수 있다. 글로벌 사모대출 시장의 조정이 본격화되면 해외 매물이 국내 시장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고, 국내 NPL 전문 운용사들의 투자전략도 이에 맞춰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아폴로의 마크 로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2월 투자자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 수익을 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나쁜 일'이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투자자들이 지금 당장 봐야 할 지표 3가지

이 흐름이 실제로 확산되는지 확인하려면 다음 세 가지 지표를 주시해야 한다. 첫째, 글로벌 레버리지론 스프레드다. 미국 레버리지론 평균 스프레드가 500bp(5%포인트)를 넘어서면 부실 확산의 임박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사모대출 펀드 환매 제한 건수다. 아폴로·블랙스톤·아레스 등 주요 운용사의 분기 보고서에서 환매 제한(Gate) 발동 건수가 증가하면 강제 매각 압력이 본격화되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미 연준 기준금리 경로다. 연내 금리 인하 횟수가 시장 예상(2~3)을 크게 웃돌면 부실 자산 매입 기회가 조기에 소멸할 수 있다. 반대로 고금리가 길어질수록 벌처 펀드들의 수익 전망은 밝아진다.

지금 글로벌 금융시장은 '부채의 역습' 구간에 진입했다. 겉으로 드러난 낮은 공식 부도율에 안주하기보다, 숨겨진 부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을 냉정하게 추적해야 한다. 강제 매각과 기업 지배권 이전이 본격화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그 타이밍을 선점하는 쪽이 이번 사이클의 진정한 승자가 될 것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