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 확보전 너머 ‘전력망’ 병목 심화…변압기·스위치기어 수급 불능에 프로젝트 절반 차질
20년간 투자 정체된 전력 설비가 ‘AI 아킬레스건’…대중 관세 장벽이 자국 인프라 발목
2026년 목표 전력량 12GW 중 3분의 1만 착공…공급망 다변화·설비 표준화 실패 시 AI 주도권 상실
20년간 투자 정체된 전력 설비가 ‘AI 아킬레스건’…대중 관세 장벽이 자국 인프라 발목
2026년 목표 전력량 12GW 중 3분의 1만 착공…공급망 다변화·설비 표준화 실패 시 AI 주도권 상실
이미지 확대보기블룸버그통신은 2일(현지시각) 보도를 통해 "미국의 AI 구축이 중국산 전기 부품 수입에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며 공급망 병목 현상 탓에 올해 계획된 미국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중 약 절반이 지연되거나 취소될 처지에 놓였다고 전했다.
6500억 달러 쏟아부어도 ‘먹통’…텍사스 벌판의 거대 센터도 ‘부품 대기 중’
미국 텍사스주 애빌린(Abilene)에 건설 중인 오픈AI(OpenAI) 전용 데이터센터는 AI 시대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완공 시 1.2기가와트(GW)의 전력을 소비하게 될 이 시설은 약 100만 가구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전력 포식자’다. 하지만 자본과 기술이 충분함에도 공사는 가시밭길이다.
시장조사업체 사이트라인 클라이메이트(Sightline Climate) 분석에 따르면, 오는 2026년까지 미국에서 가동을 목표로 한 데이터센터의 총 전력 용량은 12GW에 달한다. 그러나 현재 실제로 착공에 들어간 물량은 이 중 3분의 1 수준인 4GW 내외에 불과하다. 구글,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이 올해에만 6500억 달러(약 982조 원)를 투입하겠다고 공언했음에도, 전기를 배분하고 전압을 조절할 기초 설비가 없어 땅만 파고 있는 셈이다.
변압기 리드타임 ‘2년→5년’ 폭증…AI 전력 밀도가 부른 공급망 붕괴
가장 심각한 병목 구간은 변압기와 스위치기어다. 변압기는 고압 전류를 칩 구동에 적합한 전압으로 바꿔주는 핵심 장비다. 과거 주문 후 수령까지(리드타임) 2년 내외가 소요됐으나, 최근 AI 열풍으로 수요가 폭증하며 대기 시간이 최대 5년까지 늘어났다.
이러한 지연의 원인은 구조적이다. 변압기는 반도체처럼 고속 혁신 산업이 아니라 장기 설비 산업이기 때문에 지난 20년간 미국 내 투자가 정체됐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클라우드보다 전력 밀도(Power density)가 수배 높고, GPU 연산 시 순간 부하가 급증하는 특성이 있어 기존 전력망 장비로는 대응이 어렵다.
전력 인프라 전문 기업 GE 베르노바(GE Vernova)의 필리프 피롱(Philippe Piron) 부문장은 “과거에는 30개월 정도면 관리가 가능했지만, 지금 AI 기업들은 18개월 이내 납기를 원한다”며 시장의 극심한 수급 불균형을 지적했다.
관세 높였는데 성조기 단 중국산 ‘수두룩’…공급망의 치명적 역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기업들은 결국 중국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우드 맥켄지(Wood Mackenzie)의 벤자민 부셔(Benjamin Boucher) 선임 분석가는 “미국 내 제조 역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사실상 수입 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미국 내 유틸리티 경영진들이 지난 1월 중국 변압기 공장을 방문했을 때, 출고 대기 중인 제품의 절반가량에 미국 성조기가 붙어 있었으며 일부는 유명 데이터센터 기업으로 향하는 물량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정부는 제조업 부활 정책을 펼쳤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자료를 보면, 전력용 리튬이온 배터리의 중국산 수입 비중은 여전히 40%를 웃돈다. 변압기와 스위치기어 역시 특정 품목에서는 중국산 비중이 30%대에 이른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의 조슈아 버스비(Joshua Busby) 교수는 “중국 의존도를 무리하게 0으로 만들려다가는 미국 기업들이 막대한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라며 무차별적인 대중 규제가 자국 인프라 건설을 방해하는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고 부품까지 재활용하는 처절한 사투…한국 기업 수혜
공급망 확보에 사활을 건 일부 기업들은 고육지책까지 동원한다. 데이터센터 인프라 기업 크루소(Crusoe)는 폐쇄된 발전소에서 떼어낸 낡은 변압기를 수리해 재사용하고 있다. 또한, 부품 수급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들여 장비를 사재기하거나, 아예 스위치기어를 직접 제조하는 설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앤드루 라이켄스(Andrew Likens) 크루소 에너지 부문 책임자는 “공급망 중 단 하나만 늦어져도 프로젝트 전체가 멈춘다”며 전력 인프라가 성패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미국의 전력망 공급 병목 현상은 기술력과 생산 능력을 동시에 갖춘 한국 전력기기 업체들에게 사상 유례없는 '슈퍼 사이클'의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미·중 갈등으로 중국산 변압기 수입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 국내 기업들은 북미 시장의 핵심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최근 우리 기업들은 단순 수출을 넘어 현지 생산 거점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며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북미 전력청들이 요구하는 초고압 변압기 분야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수주 잔고는 이미 3~4년 치를 넘어선 상태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전용 전력 솔루션과 가스절연개폐장치(GIS) 등 고부가가치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 확대는 가속화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내 제조 역량 복원이 더딘 만큼, 한국의 견고한 공급망이 글로벌 AI 인프라의 중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AI 전쟁은 칩 설계 능력을 넘어 ‘누가 더 빨리 전력망을 깔 수 있는가’라는 물리적 속도전으로 전환됐다. 미국은 인허가 절차와 제조 인력 부족이라는 고질적 문제에 직면한 반면, 중국은 국가 주도의 초고압 송전망(UHV) 구축을 통해 제조 생태계를 장악했다. 미국은 단기적으로는 중국산 수입을 유지하되, 중장기적으로는 멕시코나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로 생산지를 이전하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과 전력 설비의 표준화·모듈화가 필수적이다. ‘전기 없는 AI’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미국 AI 전략의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