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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제약 쇠락 가속, 미·중 패권에 R&D 점유율 반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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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제약 쇠락 가속, 미·중 패권에 R&D 점유율 반토막

트럼프발 약가 인하 압박과 중국 바이오 굴기 사이 고립무원 처지
글로벌 신약 파이프라인 33% 중국 점령, 유럽 경제안보 위기 고조
유럽의 글로벌 R&D 비중은 1990년 50%에서 현재 26%까지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유럽의 글로벌 R&D 비중은 1990년 50%에서 현재 26%까지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로이터


글로벌 바이오 패권 전쟁의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유럽 제약 산업이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과 중국의 파괴적인 공세에 밀려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한때 세계 연구개발(R&D)의 절반을 책임지던 유럽의 위상이 불과 35년 만에 반토막 나면서, 유럽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성장 엔진이 멈춰 설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졌다.

미국 경제 매체 CNBC가 지난 11일(현지시각) 보도한 데이터와 네덜란드 금융그룹 ING의 헬스케어 리포트를 분석한 결과, 유럽의 글로벌 R&D 비중은 1990년 50%에서 현재 26%까지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최혜국 대우’ 약가 정책의 역습: 유럽 시장 ‘패싱’ 현실화


현재 유럽 제약 산업을 정조준하고 있는 가장 큰 외부 압력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의약품 가격 정책이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 내 약가를 타 선진국 최저가에 맞추는 ‘최혜국 대우(MFN)’ 제도를 추진 중이다.

이는 제약사들에 수익 구조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협이다. 약값이 유럽보다 평균 3배 높은 미국 시장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제약사들이 유럽 내 신약 출시를 늦추거나 아예 건너뛰는‘유럽 패싱’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디데릭 스타디그 ING 헬스케어 수석 분석가는 "미국의 가격 압박은 제약사들이 유럽 정부와 협상할 때 강력한 탈출 명분이 되고 있다"며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투자 자본은 자연스럽게 유럽을 떠나 미국 본토로 회귀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중국 바이오텍의 ‘퀀텀 점프’: 혁신 설계자 지위 찬탈


유럽이 규제에 발이 묶인 사이, 중국은 ‘바이오 굴기’를 통해 제약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10년 전 글로벌 신약 후보 물질(파이프라인) 점유율이 4%에 불과했던 중국은 현재 33%까지 성장하며 전 세계 혁신 설계자의 지위를 굳혔다.
피치북(PitchBook)의 지난 1월 분석에 따르면, 중국 바이오 기업들은 막대한 자본과 차별화된 기초 과학 기술을 앞세워 글로벌 거대 제약사(Big Pharma)들의 필수 파트너로 부상했다.

반면 유럽은 27개국의 파편화된 규제 환경과 미국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벤처 캐피털 투자 규모 탓에 혁신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다.

[Insight Q&A] 유럽 제약의 위기, 왜 경제안보 문제인가?

Q: 제약 산업의 이탈이 유럽 경제에 미치는 실제 타격은 어느 정도인가?

A: 유럽제약산업협회(EFPIA) 나탈리 몰 사무총장에 따르면, 제약 산업이 무너질 경우 유럽은 현재 1300억 유로(약 225조 원) 흑자에서 880억 유로(약 152조 원) 규모의 무역 수지 적자 국가로 전락한다. 이는 단순한 산업 위축을 넘어 국가 경제 전반의 안보 위기로 직결된다.

Q: 유럽이 내놓은 대응책은 실효성이 있는가?

A: 최근 유럽연합(EU)이 규제 간소화를 골자로 한 ‘바이오텍 법안’을 제안했으나, 각 회원국 정부의 행정적 장벽이 여전해 기업들의 체감 효과는 미미하다. 오히려 미국 국립보건원(NIH) 예산 삭감 등을 기회로 삼아 mRNA 등 신영역 선점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험실의 영광’ 되찾기 위한 골든타임


유럽은 현재 자국 이기주의와 파편화된 규제라는 내부 벽에 가로막혀 스스로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와 일라이 릴리 등 주요 기업들이 투자 보류를 선언한 것은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 붕괴의 전조 증상이다.

유럽이 ‘혁신의 요람’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약가 정책의 유연성 확보와 자본 시장 통합이라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

미·중 패권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유럽이 선택할 ‘제3의 길’이 향후 글로벌 바이오 지형도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