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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봉쇄發 '수조 원 법정 전쟁'… 셸·페트로차이나 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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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봉쇄發 '수조 원 법정 전쟁'… 셸·페트로차이나 격돌

셸, 페트로차이나에 516억 원 배상 청구… 무르반 선물 거래량 4년 만에 최저
이란 전쟁 發 중동 원유 계약 분쟁 전방위 확산, 국제 석유 시장 신뢰 기반 흔들
셸(Shell), 페트로차이나(PetroChina), 토탈에너지(TotalEnergies) 등 세계 최대 석유 기업들이 미인도 원유 화물 계약을 두고 복잡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셸(Shell), 페트로차이나(PetroChina), 토탈에너지(TotalEnergies) 등 세계 최대 석유 기업들이 미인도 원유 화물 계약을 두고 복잡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이미지=제미나이3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중동산 원유를 둘러싼 수조 원 규모의 계약 분쟁이 글로벌 석유 거래 시장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셸(Shell), 페트로차이나(PetroChina), 토탈에너지(TotalEnergies) 등 세계 최대 석유 기업들이 미인도 원유 화물 계약을 두고 복잡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고 보도했다.

한 트레이딩 업체 고위 임원은 이 분쟁들의 규모가 자사 이익에 최대 5억 달러(약 7380억 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재개된 뒤에도 이번 법적 공방이 중동 에너지 시장을 오랫동안 짓누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런던 대형 로펌 구하기 어렵다"… 분쟁 규모·복잡성 전례 없어
분쟁의 발화점은 아랍에미리트(UAE)의 대표 원유인 무르반(Murban) 화물이다. 무르반 선물은 아이스 퓨처스 아부다비(IFAD) 거래소와 장외 시장에서 거래되며, 두바이·오만 선물과 함께 중동 원유 수출 가격을 결정하는 핵심 지표다.

2021년 출범한 IFAD 거래소는 셸·페트로차이나·토탈에너지·비톨(Vitol) 등 세계 주요 석유 기업들이 파트너로 참여해 아부다비를 글로벌 원유 거래 허브로 키우려는 목표로 설립됐다.

이번 분쟁의 핵심은 지난 3월 21일 선적 예정이었던 무르반 화물 50만 배럴이다. 해당 화물은 셸·중국해양석유(CNOOC)·토탈에너지·머큐리아(Mercuria)·페트로차이나 등 여러 회사 손을 거쳐 사고 팔렸으며, 최종적으로 페트로차이나 자회사가 IFAD 거래소 계약 결제 명목으로 셸에 인도해야 했다.

그러나 표준 계약 물량인 50만 배럴 대신 6만 2000배럴만 인도됐다. 셸은 페트로차이나 자회사에 약 3500만 달러(약 516억 원)의 배상을 요구하며 IFAD에 신고했고, IFAD는 현재 조사 중이다.

페트로차이나 측은 셸이 장외 시장에서 이미 줄어든 물량으로 해당 화물을 판매한 당사자였던 만큼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셸은 물량 축소가 자사 공급처의 결정이었다고 해명하면서도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물량 축소의 배경에는 아부다비국영석유회사(ADNOC)가 3월 중순 무르반 생산 지분 파트너들에게 해당 월 잔여 물량의 80%만 출하할 수 있다고 통보한 것이 있다. UAE는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아부다비~푸자이라 간 송유관을 통해 원유 공급을 이어왔지만, 생산량 자체는 줄었다.

토탈에너지와 셸 사이에도 무르반을 포함한 여러 중동 원유 등급을 둘러싼 별개 분쟁이 진행 중이라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이번 보도에 대해 셸·토탈에너지·ICE는 논평을 거부했고, 머큐리아·페트로차이나·CNOOC는 답변하지 않았다.

분쟁의 구조적 복잡성도 사태를 키우고 있다. 원유 화물은 탱커에 실리기 전 이미 여러 차례 사고 팔리는 것이 업계 관행이라, 한 화물에 연동된 법적 책임 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 계약들은 대부분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하는데, 머큐리아 에너지그룹의 기욤 베르메르시(Guillaume Vermersch)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주 FT 원자재 글로벌 서밋에서 "협상 타결이 이뤄지고 위기가 끝나더라도 엄청난 청구·계약 분쟁·불가항력 해석 논란·법적 다툼이 쏟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비톨·트라피구라(Trafigura) 임원들도 같은 우려를 나타냈다. 런던의 주요 로펌 대부분이 이미 분쟁의 한쪽 당사자를 대리하고 있어 새 사건을 수임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

4년 만에 최저로 떨어진 무르반 거래량… 시장 신뢰 흔들


분쟁 여파는 곧바로 시장 지표에 나타나고 있다. 이란 전쟁이 시작된 뒤 무르반 선물의 미결제약정과 거래량은 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무르반 선물은 2021년 3월 IFAD 거래소 출범 이후 아시아 수입업체들의 핵심 가격 지표로 자리 잡았으며, 2024년에는 분기 거래량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두바이·오만 선물과 함께 중동 원유 가격의 3대 축으로 성장했다. 이번 사태가 그 성장세를 꺾는 기로에 선 셈이다.

법적 해결도 쉽지 않다. IFAD 거래소에서 체결된 계약은 인터컨티넨털익스체인지(ICE) 산하 결제소를 통해 청산되지만, 장외 계약은 당사자 간 약정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법적 지위가 다르다. 같은 화물에 연동된 거래소 계약과 장외 계약 사이의 법적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가 이번 사태 해결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더 넓은 시장 맥락에서 보면, 이번 사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유 공급 충격이 빚어낸 연쇄 반응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하루 약 2000만 배럴, 전 세계 해상 원유 거래량의 20% 안팎이 오가는 길목이다.

이란 전쟁 직후 유조선 통행량이 70% 넘게 급감했고, 국제유가(브렌트유)는 배럴당 105달러를 웃도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미군 중부사령부(CENTCOM) 브래드 쿠퍼(Brad Cooper) 사령관은 지난달 29일 "현재 이란이 팔지 못하는 원유를 실은 유조선 41척에 6900만 배럴이 묶여 있으며, 이란이 금융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게 막은 수익 손실 추산액은 60억 달러(약 8조 8620억 원) 이상"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지난달 13일부터 이란 항구를 오가는 선박만을 대상으로 해상 봉쇄를 시행 중이다.

이번 계약 분쟁이 어떻게 결론 나든, 중동 에너지 시장 참여자들이 당연하게 여겨온 계약 이행의 전제들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바클리즈·골드만삭스 등 금융기관 분석가들은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장기간 제한될 경우 고유가 기조가 이어질 위험이 크다고 경고하고 있으며, 지금 진행 중인 법적 다툼은 그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는 변수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