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시장 경쟁 심화와 무리한 인수로 50억 달러 대규모 상각
경영진 신뢰 회복과 상업적 집행력 재구축이 주가 반등의 관건
경영진 신뢰 회복과 상업적 집행력 재구축이 주가 반등의 관건
이미지 확대보기호주 최대의 바이오테크놀로지(생명공학) 기업인 시에스엘(CSL)이 글로벌 시장 환경 악화와 경영적 판단 착오가 겹치며 최근 2년간 시가총액 1050억 달러(약 157조 원)가 증발하는 최악의 경영 위기에 직면했다.
시드니모닝헤럴드(The Sydney Morning Herald)가 지난 16일(현지시각)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CSL은 누적된 실적 하향 조정과 갑작스러운 최고경영자(CEO) 사임 파동 속에 주가가 최고점 대비 급락하며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이번 사태는 독점적 지위에 안주하던 거대 제약사가 거시경제적 환경 변화와 경쟁사의 공격적인 시장 진입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때 겪는 위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핵심 사업 혈장 치료제 흔들, 미국·중국서 잇단 타격
CSL의 핵심 성장동력이자 전체 영업이익의 70%를 차지하는 혈장 및 혈장 기반 치료제 사업이 흔들리고 있다.
호주 정가와 투자은행(IB) 업계의 분석을 종합하면 CSL은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스페인계 경쟁사인 그리폴스(Grifols) 등의 공격적인 점유율 확대 전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 탓에 유통 물량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만 3억 미국 달러(약 45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제2의 성장 축으로 꼽히던 중국 시장 상황도 나빠졌다. 중국 현지 병원의 예산 통제 정책이 강화되면서 CSL의 주력 혈장 단백질 제품인 알부민의 수요와 가격이 동시에 떨어졌다. 이에 따라 중국 사업 부문에서만 2억 미국 달러(약 3000억 원) 규모의 실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자산운용사 얼라이언스번스틴(AllianceBernstein)의 안야 사마르지치(Anja Samardzic)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최근 분석을 통해 "혈장 시장의 근본적인 성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며 "문제는 그동안 시장을 지배해 온 CSL 내부에 안일함이 자리 잡았고, 만년 하위 경쟁사들이 공격적으로 점유율을 빼앗아 올 때 상업적인 방어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점"이라고 지적했다.
160억 달러 무리한 인수합병, 50억 달러 대규모 상각 부메랑
그러나 시장에서는 CSL이 해당 기업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과도한 비용을 지불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비포의 주력 제품인 철분 기반 치료제들이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제네릭(복제약) 경쟁사들의 거센 추격을 받으면서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했다.
이에 따라 CSL은 이번 반기 실적 발표를 통해 비포 사업 부문에서만 50억 미국 달러(약 7조 5000억 원) 규모의 영업권 감액손실(Writedown)을 처리했다. 투자자가 기대했던 신성장 동력이 오히려 전체 재무 구조를 갉아먹는 대형 악재가 된 셈이다.
최고경영자 경질과 가이드라인 번복, 바닥 친 시장 신뢰
경영진의 잇따른 판단 착오와 미숙한 시장 소통은 투자자들의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실적 전망치 하향 조정에 책임을 지고 구조조정을 이끌던 폴 맥켄지(Paul McKenzie) 최고경영자가 지난 2월 반기 실적 발표 하루 전에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이 과정에서 호주증권거래소(ASX)의 연장된 거래 시간 규정을 인지하지 못해 주식 거래가 중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임 공시가 나가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이 여파로 시장에서는 공황 매도가 발생하며 시가총액 수십억 달러가 추가로 날아갔다.
뒤이어 임시 지휘봉을 잡은 고든 네일러(Gordon Naylor) 대행과 켄 림(Ken Lim)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당초 매출 2~3% 성장, 호전된 실적 달성이 가능하다며 시장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불과 90일 만에 내부 재무 정밀 진단을 거쳐 올해 매출과 순이익이 오히려 감소할 것이라며 기존 지침을 완전히 번복했다.
모닝스타(Morningstar)의 셰인 폰라지(Shane Ponraj) 애널리스트는 투자 보고서에서 "시장은 전반적인 실적 전망치 하향 조정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번 위기는 단순한 일시적 부진이 아닌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 현상"이라며 "재무제표 상의 부실을 털어내는 대규모 상각은 결국 냉혹한 현실과의 충돌을 인정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벨 포터(Bell Potter)의 토마스 와킴(Thomas Wakim) 연구원 역시 최근 보고서를 통해 "2026~2027 회계연도까지 이익 전망이 어둡고 경영진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연이은 실적 충격으로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라며 주가 할인 거래의 불가피성을 언급했다.
코로나19 확산 시기 주가수익비율(PER) 44배를 웃돌던 CSL의 멀티플은 현재 10배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CSL이 장기 성장성을 회복하려면 공격적인 시장 확장보다 잃어버린 자본시장의 신뢰를 다시 쌓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