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No 고션’ 외치다 파산 위기 美 시골마을… 미·중 배터리 전쟁의 잔혹한 청구서

글로벌이코노믹

‘No 고션’ 외치다 파산 위기 美 시골마을… 미·중 배터리 전쟁의 잔혹한 청구서

미시간주 그린 차터 타운십, 中 EV 배터리 공장 계약 철회 후 수억 불 소송전 직격탄
‘中 공산당 트로이 목마’ 여론에 이사회 교체… 2,300만 달러 배상 요구에 지급 능력 마비
트럼프·밴스까지 가세한 정치 선동의 결말… 美 ‘공급망 자립’ 정책과 지역 정서의 치명적 충돌
중국 고션의 미국 배터리 공장 앞 로고. 사진=고션이미지 확대보기
중국 고션의 미국 배터리 공장 앞 로고. 사진=고션
불과 3년 전, 미국 미시간주의 조용한 농촌 마을 주민들은 커뮤니티 홀을 가득 메우며 환호성을 질렀다. 중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배터리 제조업체의 대규모 공장 유치를 저지하며 ‘지역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과 환경 오염을 막아냈다며 서로를 껴안았던 주민들의 축제는 이제 마을의 존립 자체를 흔드는 잔혹한 재정적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21일(현지시각)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미시간주 그린 차터 타운십(Green Charter Township)은 중국 배터리 거두 고션하이테크(Gotion High-Tech)의 북미 자회사인 ‘고션(Gotion Inc.)’이 제안한 23억 6,000만 달러(약 3조 6,170억 원)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패널 공장 건립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그러나 이 철회 조치로 인해 마을은 수억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리며 지자체 파산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중이다.
당초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 프로젝트는 109헥타르(약 270에이커) 부지에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셀과 전기차 핵심 부품 공장을 짓는 메가 프로젝트였다. 약 2,5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며 미국 청정 에너지 제조업 부활의 상징으로 대대적으로 홍보됐다.

“중국의 트로이 목마 안 된다” 이사회 갈아치운 주민들… 돌아온 건 ‘수억 불 소송장’


그러나 주민들의 시선은 냉담했다. 이들은 중국계 기업이 들어올 경우 장기적인 감독과 통제가 불가능해질 것이라 우려했다. 아울러 미시간 호수로 흘러드는 머스키건 강 시스템과 인근 보호 습지가 심각하게 오염될 것이라는 환경적 공포도 확산됐다.

주민들은 이를 중국 공산당의 침투를 허용하는 ‘트로이 목마’로 규정하고, 공장 유치를 지지했던 기존 타운 이사회를 주민 투표로 전원 퇴출시킨 뒤 새 이사회를 구성해 계약을 전격 파기했다.

승리의 기쁨은 잠시였다. 고션 측은 계약 이행 계약 위반을 이유로 타운십을 상대로 법정 소송을 제기했다. 이미 법원으로부터 예비 금지명령 승소 판결을 받아내며 명분을 쥔 고션은 이번 달 소장을 전격 수정해 최소 2,300만 달러(주 정부 보조금 반환액)에 더해, 프로젝트 지연에 따른 이익 손실 등 총 ‘수억 달러’ 규모의 추가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지역 활동가 마조리 스틸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다국적 기업이 고작 주민 3,000명 사는 작은 시골 마을을 벌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무차별 소송을 벌이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제이슨 크루즈 타운십 감독관은 "우리처럼 세수 기반이 취약한 소규모 자치단체가 2,300만 달러 이상의 배상 판결을 받는다면 쉽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며 재정 마비 사실을 시인했다.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난 법률 비용 탓에 공공 예산은 적자로 돌아섰으며, 도로 유지보수나 비상 예비비 등 주민 복지 예산은 수년간 동결될 위기다. 주민들은 빚을 메우기 위해 재산세가 폭등해 야반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공포에 떨고 있다.

짚어 삼켜진 영토 분쟁… 트럼프·밴스 가세해 당파 정치 ‘제물’로


이 시골 마을의 갈등이 통제 불능 수준으로 치솟은 배경에는 미국의 거대한 중앙 정치 논리와 포퓰리즘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대선 기간 동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을 저지하겠다며 고션 공장 건립을 정면 비판했고, 그의 러닝메이트인 J.D. 밴스 부통령 후보 역시 지역 집회에 직접 참석해 이 분쟁을 ‘미국의 국가 안보와 주권이 걸린 전장’으로 규정하며 불을 질렀다.

하원 중국특위 위원장인 존 물레나르 의원 역시 고션의 소송을 "공산당식 법률 전쟁의 전형"이라 비난하며 ‘노 고션(No Gotion)’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워싱턴 정가가 지역 주민들의 불안감을 당파 정치의 도구로 철저히 활용하면서, 합리적인 타협이나 출구 전략은 원천 차단됐다.

워싱턴 싱크탱크 퀸시 연구소의 데니스 사이먼 박사는 "중국, 전기차 정책, 안보, 당파 정치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타협이 불가능한 구조가 됐다"며 "정부 기관이 공식 체결한 법적 계약에 의존해 기업이 이미 수천만 달러를 지출한 상황에서, 정치적 이유로 이를 일방 철회한 것은 치명적인 사법적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 믿고 투자하겠나”… 글로벌 자본 이탈 부르는 잔혹한 선례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미국의 가장 심각한 경제적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낸 시험대라고 입을 모은다. 바이든과 트럼프 행정부를 막론하고 워싱턴은 아시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미국 땅에 더 많은 배터리 공장과 반도체 팹, 인프라를 건설하라고 전방위로 압박해 왔다.

그러나 정작 미국 내 수많은 지역사회는 자국 영토 내에 혐오 시설이나 외국계 공장이 들어서는 것에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결국 이번 그린 차터 타운십의 비극은 미국에 진출하려는 다른 글로벌 개발업자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심각한 경고 신호를 보낸 꼴이 됐다.

사이먼 박사는 "해외 투자자들은 이제 미국의 현지 승인이 선거 결과에 따라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리스크를 목격했다"며 "앞으로 미국 투자를 기피하거나 훨씬 높은 위험 보험료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중 테크 냉전의 최전선에서 터져 나온 손톱만 한 세라믹 부품(MLCC) 유통 전쟁이나 아프리카 기니 철광석(시만두) 공급망 장악 경쟁처럼, 미국 안방에서 벌어진 국산화 공급망 유치 전쟁 역시 지정학적 이념에 가로막혀 자멸적인 상처를 남기고 있다.

지방정부가 파산할 수준의 수억 달러짜리 법적 청구서 앞에 선 미시간 주민들의 분쟁은, 냉혹한 국제 정치와 무역 룰을 망각한 감정적 자원 민족주의가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신경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hincm@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