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자금 메모리주로 이동…실적 전망은 상향, 밸류에이션은 S&P500 아래로
이미지 확대보기주가는 고점 대비 크게 밀렸고 밸류에이션은 AI 붐이 본격화되기 전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실적 전망이 나빠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월가는 엔비디아의 이익 전망을 높이고 있다. 문제는 AI 투자자금의 방향이 그래픽처리장치(GPU) 절대 강자인 엔비디아에서 메모리와 다른 반도체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엔비디아 주식이 AI 열풍 이전 이후 가장 싼 수준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9일(이하 현지 시각) 보도했다. 엔비디아 주가는 지난 5월 14일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뒤 16% 하락했다. 이 과정에서 시가총액 약 1조 달러가 사라졌다.
엔비디아의 GPU는 여전히 AI 데이터센터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시선은 달라졌다. 투자자들은 AI 반도체 랠리 안에서 엔비디아 비중을 줄이고 마이크론테크놀로지 같은 메모리주와 AMD, 인텔 등 후발 반도체 기업으로 자금을 옮기고 있다.
◇ PER 18배, 2019년 초 이후 최저
블룸버그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향후 12개월 예상 이익 기준 주가수익비율(PER) 18배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엔비디아 PER이 이 정도로 낮아진 것은 지난 2019년 초 이후 처음이다.
이는 미국 대표 지수와 비교해도 이례적이란 지적이다. S&P500지수는 12개월 선행 PER 20배 이상, 기술주 중심 나스닥100지수는 거의 23배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한때 월가에서 가장 뜨거운 성장주였던 엔비디아가 이제는 미국 대형주 평균보다도 낮은 가격표를 달게 된 셈이다.
주가 하락의 원인이 실적 악화라면 설명은 단순하다. 그러나 지금의 엔비디아 조정은 그런 경우와 다르다. 월가 애널리스트들은 오히려 향후 분기 이익 전망을 계속 상향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엔비디아가 올해 S&P500 기업 가운데 네 번째로 빠른 매출 증가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밸류에이션 하락은 기업 펀더멘털보다 시장의 관심 이동을 반영한다. AI 붐 초기에는 엔비디아가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처럼 보였다. 이제는 AI 공급망 안에서 수혜 범위가 넓어졌고, 투자자들은 새로운 상승 여지를 찾아 다른 종목으로 움직이고 있다.
◇ AI 랠리 중심축, GPU에서 메모리로
마이크론은 HBM 가격 상승과 AI 메모리 수요 확대의 대표 수혜주로 꼽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마이크론 주가는 2026년 들어 229% 올랐다. 2025년에도 239% 급등하며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 상승을 이끌었다.
반면 엔비디아는 올해 들어 5.6% 오르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S&P500지수 상승률 9.6%, 나스닥100지수 상승률 16%에 못 미친다.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74% 뛰며 2003년 이후 최고의 연간 흐름을 향하고 있다.
이 대조는 AI 트레이드의 성격이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장은 더 이상 엔비디아 한 종목만으로 AI 투자를 설명하지 않는다. GPU, HBM, 저장장치, 주문형 반도체, 파운드리, 전력 인프라까지 AI 공급망 전반을 나눠 보기 시작했다.
◇ “기대 낮았던 기업들이 스포트라이트 훔쳐”
풀턴 브레이크필드 브로니먼의 마이클 베일리 리서치 책임자는 “시장 심리가 이동했다”면서 “기대가 낮았던 마이크론 같은 기업들이 주목을 빼앗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말은 엔비디아가 나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엔비디아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승자다. 투자자들이 새롭게 큰 수익을 기대하려면 이미 높은 기대가 반영된 엔비디아보다 뒤늦게 재평가받는 메모리주와 경쟁 반도체주를 선호할 수 있다.
AMD와 인텔도 올해 주가가 두 배 또는 세 배 가까이 올랐다. 인텔은 파운드리 재건과 미국 반도체 자립 정책의 수혜주로 다시 평가받고 있고, AMD는 엔비디아 대항마로 AI 가속기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려 한다.
엔비디아는 AI 데이터센터의 핵심을 쥐고 있지만 자금 흐름에서는 오히려 ‘자금 조달원’이 됐다. 많이 오른 엔비디아를 팔아 다른 AI 수혜주를 사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 시장점유율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주가와 달리 엔비디아의 시장 지위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집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지난해 말 서버 GPU 시장의 97%를 차지했다. 2024년 말 95%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대형 고객의 자체 칩 개발도 아직 엔비디아의 지배력을 크게 훼손하지 못했다. 알파벳과 아마존 등 하이퍼스케일러는 자체 맞춤형 AI 칩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엔비디아에 경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계속 강한 상황에서 엔비디아 장비에 대한 의존은 여전히 크다. 최첨단 AI 모델을 학습하고 운영하려면 엔비디아 GPU와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필요하다. 쿠다(CUDA)를 중심으로 한 개발자 생태계도 강력한 진입 장벽이다.
결국 엔비디아 주가 하락은 시장점유율 붕괴보다 포트폴리오 재조정의 성격이 강하다. 독점적 지위는 유지되지만 주가가 앞서 너무 빠르게 달렸고, 투자자들이 AI 내 다른 수혜주를 찾고 있다는 얘기다.
◇ 2027 회계연도 매출 3930억 달러 전망
월가가 엔비디아를 여전히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실적 전망이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2027 회계연도에 매출 3930억 달러(약 593조4000억 원), 이익 2280억 달러(약 344조3000억 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7 회계연도는 2027년 1월 31일 끝나는 회계연도다.
이는 각각 82%, 90% 증가를 뜻한다. 특히 이익 전망치는 최근 3개월 동안 13% 높아졌다. 주가는 밀렸지만 실적 예상은 올라간 것이다.
애널리스트 평가도 강하다. 블룸버그가 추적하는 엔비디아 담당 애널리스트 82명 가운데 보유 의견은 3명, 매도 의견은 1명뿐이다. 평균 목표주가는 302달러(약 45만6000원)로 향후 12개월 동안 50% 이상 상승 여력을 시사한다.
이는 이른바 매그니피센트7 가운데 가장 높은 기대 수익률이다. 시장 가격은 차가워졌지만 월가의 이익 전망과 목표주가는 여전히 뜨겁다.
◇ “주식은 결국 이익을 따라간다”
헌팅턴뱅크의 랜디 헤어 주식 리서치 책임자는 엔비디아가 “현재 수준에서 저평가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엔비디아의 매출 성장과 수익성이 안정적으로 입증돼 왔다며 주식은 결국 이익을 따라간다고 말했다.
이 시각에서 보면 지금의 조정은 주가 멀티플 압축이다. 기업의 이익 전망은 커지고 있는데 시장이 적용하는 PER은 낮아졌다. 이익은 오르는데 주가는 쉬면서 밸류에이션 부담이 크게 줄어든 셈이다.
엔비디아는 과거에도 멀티플 압축을 겪은 뒤 빠르게 회복한 경험이 있다. AI 붐 이전에도 게임, 데이터센터, 암호화폐, 자율주행 기대에 따라 주가 변동성이 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수요가 실적으로 확인될 때마다 주가가 다시 상승했다.
이번에도 관건은 실적이다. 데이터센터 매출이 예상대로 늘고, 차세대 AI 칩 전환이 순조롭게 진행되며, 마진이 유지된다면 현재 낮아진 PER은 다시 재평가될 수 있다.
◇ 고객이 경쟁자가 되는 부담
그렇다고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엔비디아의 가장 큰 고객들이 동시에 잠재적 경쟁자가 되고 있다. 알파벳,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은 모두 자체 AI 칩 개발을 강화하고 있다.
이들은 엔비디아 GPU를 대규모로 사들이는 고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비용을 낮추고 공급망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맞춤형 칩을 더 많이 쓰려고 한다. AI 인프라 비용이 너무 커지면서 자체 칩 개발 유인은 더 강해졌다.
다만 자체 칩이 곧바로 엔비디아를 대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범용성과 소프트웨어 생태계, 최첨단 모델 학습 성능에서는 엔비디아의 우위가 여전하다. 자체 칩은 특정 작업이나 내부 서비스에 최적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장은 이런 변화를 선제적으로 반영한다. 엔비디아가 계속 성장하더라도 과거처럼 압도적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경쟁과 고객 내재화가 PER을 낮추는 요인이 되고 있다.
◇ 메모리주 랠리와 SK하이닉스 변수
엔비디아 조정은 한국 반도체주와도 연결된다는 지적이다. AI 공급망에서 메모리의 가치가 커지면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마이크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특히 SK하이닉스는 HBM 주도권을 바탕으로 글로벌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한국 반도체주도 변동성이 커졌다. SK하이닉스는 미국 ADR 상장을 앞두고 대규모 자금 수요가 확인됐지만 한국 주가는 고점 대비 큰 폭으로 조정받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AI 반도체 대형주 쏠림이 컸던 한국 증시도 차익 실현과 업황 재평가 압력을 받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엔비디아와 같은 맥락에 있다. 시장은 AI 반도체 전체를 버린 것이 아니라 AI 투자 안에서 무엇이 이미 많이 올랐고 무엇이 아직 덜 반영됐는지를 다시 따지고 있어서다.
엔비디아에서 메모리주로 자금이 이동한 것처럼, 한국 시장에서도 AI 반도체 쏠림의 지속 가능성과 밸류에이션 부담이 동시에 논의되고 있다. AI는 여전히 핵심 투자 테마지만 그 안에서 승자와 가격표는 계속 바뀌고 있다.
◇ 가장 뜨거웠던 주식의 역설
엔비디아의 현재 위치는 역설적이다. 회사는 여전히 AI 데이터센터의 핵심 공급자이고 매출과 이익 전망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서버 GPU 시장점유율도 압도적이다. 그런데 주식은 S&P500 평균보다 낮은 PER에 거래된다.
이는 시장이 엔비디아의 성장을 의심한다기보다 이미 거대한 성장 기대가 주가에 반영됐다고 보고 있음을 뜻한다. 동시에 AI 투자자들이 다음 수혜주를 찾아 이동하면서 엔비디아의 상대 매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진 것이다.
엔비디아는 2022년 말부터 2025년까지 1100% 넘게 급등했다. 그런 종목이 잠시 쉬어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이 조정이 단순한 숨 고르기인지, AI 트레이드의 중심축이 구조적으로 이동하는 신호인지다.
현재까지 실적 전망만 보면 엔비디아의 사업 기반은 강하다. 그러나 주식시장은 절대 성장률만 보지 않는다. 기대 대비 추가 상승 여지, 경쟁 구도, 자금 흐름, 밸류에이션을 함께 본다.
◇ AI 붐의 2단계 진입
엔비디아의 1조 달러 시가총액 증발은 AI 붐이 끝났다는 신호라기보다 AI 붐이 2단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1단계에서는 GPU 공급자가 거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했다. 2단계에서는 메모리, 저장장치, 네트워크, 자체 칩, 전력,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까지 수혜가 넓어진다.
이 과정에서 엔비디아의 독주는 상대적으로 둔화될 수 있다. 그러나 AI 인프라의 핵심 지위를 잃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낮아진 밸류에이션은 엔비디아가 다시 실적으로 증명할 기회를 제공한다.
시장은 엔비디아를 더 이상 무조건 비싼 성장주로 보지 않는다. 지금의 가격표는 “AI 대표주이지만 평균보다 싼 주식”이라는 새로운 논쟁을 만들고 있다.
결국 향후 주가의 방향은 간단한 질문에 달려 있다. 엔비디아의 이익 증가가 낮아진 밸류에이션을 다시 끌어올릴 만큼 강한가, 아니면 AI 자금의 분산이 엔비디아 프리미엄을 계속 누를 것인가. 1조 달러 조정 뒤의 엔비디아는 AI 랠리의 끝이 아니라 AI 투자 지형이 재편되는 가운데 맞는 가장 큰 시험대에 서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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