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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값 꺾여도 美 연료값 고공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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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값 꺾여도 美 연료값 고공행진

정제마진 급등·낮은 재고·러시아 수출 제한에 휘발유·경유 부담 확대
원유 가격 진정에도 휘발유 등 정제연료 가격이 오르면서 미국 소비자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사진=챗GPT이미지 확대보기
원유 가격 진정에도 휘발유 등 정제연료 가격이 오르면서 미국 소비자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사진=챗GPT

국제유가 급등세가 진정됐지만 미국의 휘발유, 경유, 항공유 가격은 다시 오르고 있다. 원유 가격이 내려오면 소비자 연료비도 낮아지는 일반적 흐름과 달리 정제제품 가격이 버티면서 미국 물가와 소비 부담이 다시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휘발유, 경유, 항공유 가격이 원유 가격 완화에도 반등하면서 여름 성수기 여행객과 소비자 부담을 키우고 있다고 1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미국 일반 휘발유 평균 가격은 지난 10일 기준 갤런당 3.88달러(약 5800원)였다.

원유와 정제제품 가격의 괴리는 미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정제제품과 원유 가격의 차이는 사상 최고 수준으로 벌어졌다. 원유 가격은 이란 전쟁 충격을 상당 부분 되돌렸지만 정유사가 원유를 휘발유와 경유로 바꿔 얻는 마진은 오히려 커진 셈이다.

◇ 원유보다 비싼 정제제품

블룸버그에 따르면 소비자가 실제로 부담하는 것은 원유 가격이 아니라 정제된 연료 가격이다.

원유는 휘발유, 경유, 항공유, 나프타 등으로 정제돼야 차량과 항공기, 산업 현장에서 쓰인다. 원유 공급이 안정돼도 정유시설이 부족하거나 정제제품 재고가 낮으면 최종 연료 가격은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현재 시장에서는 이런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란 전쟁으로 한때 치솟았던 국제유가는 휴전과 공급 재개 기대 속에 상승분을 상당 부분 반납했다. 그러나 휘발유와 경유 가격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최근 한 주 동안 6센트(약 90원) 올라 갤런당 3.88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5월 중순 이후 가장 큰 주간 상승폭이다.

정제제품 가격이 원유보다 강하게 움직이면 소비자는 유가 하락 효과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유소 가격과 항공권, 물류비는 원유 가격보다 휘발유·경유·항공유 수급에 더 직접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 정제마진 사상 최고권


시장에서는 정제마진 급등이 연료값 고공행진의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정제마진은 원유를 사서 휘발유와 경유 같은 제품으로 만들어 팔 때 남는 차익을 뜻한다. 원유 가격이 낮아도 정제제품 가격이 높으면 정유사 마진은 커진다.

로이터는 “유럽의 경유 정제마진이 최근 배럴당 60달러(약 9만원)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서도 정유업 수익성을 가늠하는 3-2-1 크랙스프레드가 지난 8일 배럴당 64.58달러(약 9만7000원)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3-2-1 크랙스프레드는 정유사의 대표적인 정제마진 지표로 원유 3배럴을 사서 휘발유 2배럴과 경유·난방유 등 중간유분 1배럴로 정제해 팔 때 남는 가격 차이를 말한다.

이는 세계 정제 시스템의 병목을 반영한다. 전쟁과 제재, 정유시설 사고, 낮은 재고가 겹치면서 원유를 충분히 확보하더라도 이를 최종 연료로 바꾸는 능력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석유시장에서는 원유 가격이 완화돼도 정제능력이 부족하면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지금은 바로 이 병목이 소비자 가격을 떠받치고 있다.

◇ 러시아 수출 제한도 압박


러시아의 정제제품 수출 차질도 연료시장 긴장을 키우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러시아 정유 인프라가 손상되면서 러시아는 경유 수출을 제한했다. 러시아산 경유와 가스오일 수출은 이미 낮은 수준으로 줄었고 이달 들어 감소폭은 더 커진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산 경유가 줄면 유럽과 아시아, 중남미 수입국은 대체 물량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 중동, 인도산 정제제품을 둘러싼 경쟁이 커지고 가격은 더 올라갈 수 있다.

경유는 화물차와 철도, 농기계, 광산, 건설 장비에 쓰인다. 경유 가격이 오르면 물류비와 농산물 생산비, 산업 비용이 함께 뛴다. 가을 수확기를 앞둔 북반구 농가에는 경유 공급 부족이 더 민감한 부담이 될 수 있다.

항공유 가격도 여행 성수기와 맞물려 소비자 부담을 키운다. 항공사는 연료비 상승분을 운임에 반영할 수 있고 이는 여행 수요와 물가에 영향을 준다.

◇ 낮은 재고와 여름 수요


미국의 내부적인 요인도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여름철 운전 성수기에 접어들면서 휘발유 수요가 늘어나는 시기다. 6월부터 9월 초까지는 자동차 이동이 많아지고, 계절 규정에 맞춘 여름용 휘발유 생산비도 높아진다.

미국 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이달 초 미국 휘발유 재고는 5년 평균보다 약 1000만배럴 낮은 수준이었다. 걸프 연안 재고 부족도 두드러졌다. 걸프 연안은 미국 정제제품 공급의 핵심 지역이다.

미국 정유시설의 일부 가동 차질도 가격 상승에 영향을 줬다. 디트로이트와 펜실베이니아 트레이너 지역 정유시설의 문제가 공급을 더 빠듯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다 미국 석유제품 수출은 늘었다. 지난 3일로 끝난 주간 미국 석유제품 수출은 하루 870만배럴로 주간 기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해외 수요가 강해지면 미국 내 공급 여유는 줄어들 수 있다.

◇ 트럼프 물가 공약에도 부담


연료 가격 상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물가 억제와 에너지 가격 안정을 경제 성과로 강조해왔다. 그러나 중간선거를 앞두고 휘발유 가격이 다시 오르면 소비자 체감 물가는 빠르게 악화될 수 있다.

휘발유 가격은 미국 유권자가 매일 확인하는 대표적 물가 지표다. 주유소 가격판은 경제 상황에 대한 체감 판단을 즉각 바꾼다. 원유 가격이 안정됐다는 설명보다 실제 주유 비용이 더 크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석유회사들의 가격 부풀리기 가능성을 문제 삼으며 휘발유 가격 인하를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부 지역에서 할인 판매 프로그램도 내놨다.

그러나 현재 연료값 상승은 단순한 소매가격 문제가 아니란 지적이다. 정제시설 병목과 낮은 재고, 러시아 수출 제한, 중동 긴장, 계절 수요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어서다. 정부가 가격 인하를 압박해도 공급 구조가 빠듯하면 가격 하락은 제한될 수 있다.

◇ 유가 안정만으로 부족한 물가 안정


이번 연료시장 흐름은 물가 안정이 원유 가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란 전쟁 이후 원유 공급 우려가 완화되면 에너지 충격도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정제제품 시장에서는 충격이 이어지고 있다. 원유는 비교적 안정돼도 휘발유와 경유, 항공유의 수급은 여전히 빡빡하다.

정제제품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소비자물가와 기업 비용에 파급효과가 생긴다. 운송비가 오르면 상품 가격에도 영향을 준다. 항공유와 경유 가격 상승은 여행, 물류, 농업, 제조업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

중앙은행에도 부담이다. 에너지 가격이 다시 흔들리면 물가 둔화 속도는 늦어질 수 있다. 원유 가격이 잠잠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사라졌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블룸버그는 “미국 연료시장은 지금 원유 위기 이후의 두 번째 단계를 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가 위기가 잦아들어도 연료값이 계속 높은 수준에 머문다면 트럼프 행정부의 물가 안정 공약은 다시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