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 부담은 완화, 소비 과열·셰일 투자 위축 우려
전기차 전환 속도에도 변수…산유국이자 소비국인 미국의 딜레마
전기차 전환 속도에도 변수…산유국이자 소비국인 미국의 딜레마
이미지 확대보기그러나 일부 경제학자들은 싼 휘발유가 소비를 다시 자극하고 셰일업계 투자를 위축시키며 전기차 전환 속도를 늦추는 새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뉴스위크는 미국의 휘발유 가격 하락이 소비자에게 즉각적인 부담 완화 효과를 주고 있지만 경제 전반에는 또 다른 부담을 만들 수 있다고 지난달 30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전날 미국의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3.86달러(약 6000원)였다. 리터로 환산하면 약 1580원이다. 이는 지난 5월 기록한 4년 만의 최고치 갤런당 4.56달러(약 7100원)에서 크게 내려온 수준이다.
◇소비자에겐 호재, 물가에는 복합 변수
휘발유 가격 하락은 일반적으로 물가 안정에 긍정적이다. 주유비가 줄면 가계 부담이 완화되고, 운송비와 물류비도 낮아질 수 있다. 항공유와 석유화학 제품 가격에도 하방 압력이 생긴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석이 단순하지 않다. 미국 경제가 이미 강한 소비와 끈적한 물가 압력을 보이는 상황에서 싼 휘발유가 억눌렸던 수요를 다시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의 토르스텐 슬록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시장의 해석이 바뀌고 있다고 짚었다. 낮은 유가가 낮은 물가를 뜻한다는 기존 인식에서, 낮은 유가가 과열된 경제의 수요를 더 키워 물가를 다시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반론도 있다. 예일대 예산연구소의 아비 굽타 거시경제분석 부소장은 “수요 증가 효과가 있더라도 낮은 유가가 에너지 가격과 에너지 집약 제품 가격을 직접 낮추는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경제가 1970년대 오일쇼크 때보다 석유 가격 변화에 덜 민감해졌다는 점도 이런 판단의 근거다.
◇미국은 소비국이자 산유국
휘발유값 하락의 두 번째 역설은 미국의 이중적 지위에서 나온다. 미국은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 가운데 하나이면서 동시에 주요 산유국이다.
전국 소비자에게 낮아진 휘발유값은 분명 호재다. 주유비 부담이 줄면 외식, 여행, 쇼핑 등 다른 소비에 쓸 여력이 생긴다. 그러나 원유 가격 하락은 셰일업계와 산유 지역에는 부담이다.
유가가 높을 때는 프래킹 업체들이 시추와 생산 투자를 늘리고 관련 장비·서비스·고용도 함께 증가한다. 반대로 유가가 내려가면 신규 투자 유인이 약해지고, 산유 지역 경제가 둔화될 수 있다.
굽타 부소장은 유가 하락이 소비자 지출을 늘리는 효과를 주지만 셰일오일·가스 생산업체들의 투자를 억제해 그 효과를 일부 상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부담은 텍사스, 뉴멕시코, 오클라호마 같은 산유 지역에서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도 딜레마다. 휘발유값이 낮아지면 소비자 불만을 줄일 수 있지만 지나친 유가 하락은 에너지 생산 투자와 산유 지역 고용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전기차 전환에도 찬물 가능성
휘발유값 하락은 전기차 시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란전 이후 연료 가격이 급등하자 내연기관차 유지비 부담이 커졌고 전기차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졌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된 뒤 글로벌 전기차 판매 비중은 3.4%포인트 높아져 5월 전체 자동차 판매의 26.1%에 이르렀다. 이는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높은 휘발유 가격은 전기차 전환의 경제적 이유를 강화한다. 운전자가 주유비 부담을 크게 느낄수록 전기차의 유지비 절감 효과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휘발유값이 계속 낮아지면 이 흐름은 약해질 수 있다. 제임스 스톡 하버드대 정치경제학 교수는 “낮은 연료 가격이 소비자에게 내연기관차를 계속 선택하게 만들고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전환 압력을 덜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 자동차업계가 이미 글로벌 전기차 시장 경쟁에서 뒤처질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싼 휘발유가 단기적으로 소비자에게는 도움이 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미국 제조업의 미래 경쟁력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 쟁점으로 번진 주유소 가격
휘발유 가격은 미국 정치에서 가장 민감한 생활물가 지표 가운데 하나다. 소비자가 매일 주유소 전광판에서 확인하는 가격이기 때문이다. 가격이 오르면 대통령의 경제 운영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가격이 내려가면 단기적으로는 정치적 부담이 줄어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휘발유 소매업체를 공개 압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원유 가격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내려왔는데도 주유소 가격은 충분히 빨리 떨어지지 않는다며 업계에 즉각적인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석유업계는 원유와 휘발유 가격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원유는 정제 과정을 거쳐 휘발유와 경유, 항공유 등으로 바뀌며, 주유소 가격에는 정제 마진, 운송비, 재고, 세금, 환경 규제, 소매 유통비가 함께 반영된다.
따라서 원유 가격이 내려도 휘발유 가격에는 시차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전쟁과 해상 수송 차질 같은 대형 충격 뒤에는 정제와 재고 상황이 정상화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값싼 휘발유의 딜레마
미국 휘발유 가격 하락은 운전자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물가 부담을 낮추고 가계 소비 여력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경제 전체로 보면 단순한 호재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싼 휘발유는 소비를 다시 자극해 물가 안정 흐름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어서다. 원유 가격 하락은 셰일업계 투자와 산유 지역 고용에는 부담이 된다. 낮은 연료비는 전기차 전환 압력을 줄여 미국 자동차 산업의 장기 경쟁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미국은 지금 인플레이션, 고금리, 중동 정세 불안, 에너지 전환이라는 여러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휘발유값 하락은 그 가운데 하나의 부담을 덜어주지만 다른 부담을 새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운전자에게는 낮아진 주유소 가격이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일이지만 미국 경제에는 소비와 에너지 투자,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함께 흔드는 또 다른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