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2025년 늦은 가을의 어느 날, 도쿄 총리관저 내각총리대신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여성 정치인이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뒤이어 집무실 내부에서는 "형편없는 정도가 아니다! 당장 다시 짜오라!"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의 날카로운 고함이 외부에까지 울려 퍼졌다. 방금 전 총리에게 대형 경제대책 초안을 보고했던 가타야마 사쓰키(片山さつき) 재무상의 손에는 평생을 지켜온 '재정 건전성'의 논리가 담긴 17조 엔 규모의 예산 계획서가 들려 있었다.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서 시장의 충격을 최소화하려던 가타야마의 신중론이 적극 재정을 표방하는 다카이치 총리의 분노에 가로막힌 순간이었다.
이 관저 내부의 격렬한 대립과 뒤이은 가타야마 재무상의 '복종'은 즉각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했다. 재무성이 총리의 윽박지름에 밀려 대규모 돈 풀기에 나설 것이라는 소식이 외환시장에 전해지자마자, 엔화 가치는 그야말로 수직 낙하했다. 뉴욕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순식간에 폭등(엔화 가치 급락)하며 전 세계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일본 국채(JGB) 시장 역시 40년물 수익률이 17년 만에 4%를 돌파하는 등 폭락세가 연출되었다. 한때 재정 긴축과 건전성을 철칙으로 삼던 엘리트 관료 출신의 가타야마 사쓰키가,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외환시장을 뒤흔든 '일본 엔화 환율 급등의 주역'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결정적 에피소드였다.
가타야마 사쓰키는 1959년 5월 9일, 일본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에서 지식인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학박사이자 우쓰노미야대학 명예교수를 지낸 아사나가 야스오였고, 어머니 역시 도쿄여자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였다. 학문적 분위기가 풍기는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가타야마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서 압도적인 천재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사이타마 시립 다카사고 초등학교를 거쳐 일본 내 최고 명문 국립 학교인 쓰쿠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로 진학한 그녀는 언제나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는 일본 전역의 수험생이 치르는 전국 모의고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천재 소녀'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가타야마 사쓰키는 당시 최고 권력 부처였던 대장성(현 재무성)에 입성했다. 남성 중심의 완고한 엘리트 관료 사회에서 그녀의 커리어는 그 자체로 ‘여성 최초’의 역사였다.프랑스 유학파 엘리트 코스: 대장성 재직 중이던 1986년, 가타야마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관료 양성 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로 유학을 떠나 국제코스(CSE)를 수료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수아 올란드, 에마뉘엘 마크롱 등 프랑스 대통령들을 대거 배출한 이 기관에서의 경험은 글로벌 거시경제 흐름을 읽는 넓은 안목과 서구식 전략적 사고를 심어주었다.귀국 후 대장성 내 핵심 요직을 섭렵했다. 히로시마 가이타 세무서장으로 부임하며 '최초의 여성 커리어 세무서장'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정부 대표단원으로 여성 최초로 참여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역량이 가장 빛난 곳은 정부 예산 편성권을 쥐고 있는 주계국(主計局)이었다. 가타야마는 주계국에서 방위 예산을 담당하는 주계관 자리에 여성 최초로 올랐다. 각 부처의 예산 요구를 칼질하고 국가의 거시 재정 틀을 짜는 주계관 역임은 국가 재정 메커니즘을 밑바닥부터 통제할 수 있는 독보적인 '정책통'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계기였다.1990년대 후반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자산유동화증권(SPC) 법안과 일본판 리츠(REITs) 제도의 도입을 주도했다. 버블 붕괴 이후 마비된 일본 부동산 시장과 금융 시스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이 획기적인 금융 스키마는 그녀의 손을 거쳐 제도화되었으며, 시장에서는 그녀를 ‘일본 부동산 증권화의 산증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23년간의 화려한 관료 생활을 마친 가타야마는 2005년 정치권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으며 정계에 투입되었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우정 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당내 반대파들을 축출하기 위해 이른바 ‘자객 공천’ 전략을 구사했다. 가타야마 사쓰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의해 발탁된 대표적인 ‘고이즈미 키즈’로서 시즈오카 7구에 출마해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며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다.이후 참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3선에 성공한 그녀는 자민당 내에서 경제산업정무관, 총무정무관, 참의원 외교방위위원장 등을 거치며 당내 정책 역량을 강화했다. 2018년 제4차 아베 신조 개조내각에서는 지방창생·규제개혁·남녀공동참가 담당대신으로 임명되어 첫 각료 경험을 쌓았다.
정치인 가타야마 사쓰키의 성향은 확고한 강경 보수 및 내셔널리즘으로 요약된다. 역사 인식이나 안보 문제에 있어 타협 없는 강경 노선을 고수해 왔다. 이러한 정치적 궤적은 자연스럽게 자민당 내 차세대 보수 리더로 꼽히던 다카이치 사나에와의 밀접한 연대로 이어졌다.두 사람은 고이즈미 시절의 정치적 격변기를 함께 통과하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사상적 유산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당내 동료를 넘어 정치적 이념을 공유하는 핵심 동지이자 최고의 러닝메이트로 발전했다. 다카이치가 2025년 총리에 취임한 후 내각의 2인자이자 경제 사령탑인 재무상 자리에 가타야마를 앉힌 것은 이러한 오랜 신뢰와 노선 공유가 바탕이 된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원안 대비 25% 이상 폭증한 21조 3,000억 엔(한화 약 200조 원) 규모의 초팽창 종합경제대책이다. 글로벌 금융위기(2009년 14조 엔)나 동일본 대지진(2011년 15조 엔) 당시의 세출 규모를 아득히 뛰어넘는 초유의 액수였다. 만 18세 이하 국민 1인당 2만 엔 지급, 가구당 7,000엔의 전기·가스요금 보조금 지원 등 휘발성이 강한 현금성 지원책이 대거 포함되었다. 여기에 다카이치 총리의 핵심 공약인 ‘식품 소비세 2년간 한시적 중단’ 조치를 이행하기 위해 연간 5조 엔 안팎의 재원 결손까지 감당해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가타야마 사쓰키는 재정 건전성파의 수장에서 초팽창의 기수로 완벽히 변신했다. 국채 시장의 발작과 초엔저 현상이라는 경고등이 켜졌음에도, 그녀는 “다카이치 내각의 재정 확대는 물가 상승 압박을 제어하고 미래 투자를 위한 '책임 재정'의 일환”이라며 대내외 설득에 앞장서고 있다. 정권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철학을 과감히 수정하는 고도의 정치적 유연성 혹은 권력 지향적 결단력을 보여준 셈이다.가타야마 사쓰키의 이러한 극적인 기조 선회와 재무상으로서의 행보는 그녀가 품고 있는 거대한 정치적 야망과 직결되어 있다. 그녀의 일차적인 목표는 다카이치 내각의 안착과 확고한 성과 도출이다. 다카이치 총리가 거시적인 정치적 방향성을 제시하면, 자신은 재무성 친정 조직을 완벽히 장악하여 거대한 예산 팽창 스키마를 정밀하게 집행하는 사령관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권 내 대체 불가능한 2인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겠다는 전략이다.
그녀의 야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초의 여성 재무상이라는 상징적 타이틀과 더불어 대규모 경제 대책을 성공적으로 핸들링해 낸다면, 자민당 내 정책통 의원들과 우파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게 된다. 풍부한 관료 경험, 경제·금융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성, 그리고 대중적 인지도를 모두 갖춘 가타야마 사쓰키는 만약 다카이치 정권이 성과를 내고 안착할 경우 자연스럽게 '포스트 다카이치' 시대의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군으로 급부상하거나, 내각의 영수급 지도자로서 자민당을 좌우하는 최고 거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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