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한국 정부가 끝내 졌다.
법무부는 엘리엇과의 국제투자분쟁에서 나온 환송중재 판정을 받아들이고, 더는 영국 법원에 취소소송을 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판정부가 정부에 물어 주라고 한 돈은 원금 4849만 달러에 지연이자와 소송비용을 더해 약 1억13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530억 원이다. 그 돈은 결국 국민의 세금에서 나간다.
불과 아홉 달 전만 해도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지난 2월 영국 법원이 1차 판정의 일부를 취소하고 사건을 중재판정부로 돌려보내자 정부는 “배상 의무가 잠정 소멸했다”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같은 중재인 세 명이 다시 들여다본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 개입과 엘리엇의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원금은 그대로였고, 그사이 이자는 계속 불어났다. 엘리엇은 이자가 지금도 하루 1만 달러 넘게 쌓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약사의 아들, 월가의 승부사가 되다
폴 싱어는 1944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맨해튼의 약사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로체스터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다. 원래 법정 변호사를 꿈꿨지만, 아버지와 함께 주식을 사고팔다 투자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1977년, 서른셋의 싱어는 가족과 지인에게서 모은 130만 달러로 회사를 세웠다. 회사 이름은 자신의 미들네임에서 따온 ‘엘리엇’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엘리엇은 운용자산 800억 달러, 임직원 670여 명을 거느린 세계적 헤지펀드가 됐다. 2015년에는 조나단 폴록을 공동 최고경영자로 세워 후계 구도를 다졌고, 2020년에는 본사를 뉴욕에서 플로리다로 옮겼다.
그의 투자 원칙은 단순하다. 돈을 잃지 않는 것이다. 홈런보다 꾸준한 안타를 노리고, 약속은 적게 하되 결과는 크게 낸다. 대신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 부도 난 채권을 헐값에 사들인 뒤 끝까지 소송을 벌이는 방식 때문에 ‘벌처펀드’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친구들 앞에서 피아노를 즐겨 친다는 소탈한 면모도 있지만, 협상 테이블에서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인물로 통한다. 아르헨티나와는 국가부도 채권을 놓고 10년 넘게 법정 다툼을 벌였고, 2012년에는 가나에 정박한 아르헨티나 해군 훈련함을 압류하게 만들기도 했다.
기업을 상대로 한 행동주의도 그의 무기다. AT&T, 트위터, 사우스웨스트항공, BP, 펩시코까지, 엘리엇이 지분을 샀다는 소식만으로 경영진은 긴장한다. 이사회 교체와 사업 재편 요구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공화당의 큰손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에는 주요 7개국 재무장관들에게 대형 은행의 취약성을 경고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시장의 약한 고리를 남보다 먼저 보고, 그 고리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그것이 폴 싱어다.
지고도 이기는 싸움
엘리엇이 한국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15년이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확보한 뒤 제일모직과의 합병 비율이 불공정하다며 반대에 나섰다. 삼성물산 1주를 제일모직 0.35주와 바꾸는 조건이었다.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맞물린 합병이었기에, 삼성물산 주주들의 몫을 지나치게 낮게 잡았다는 것이 엘리엇의 주장이었다.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는 졌다. 최대 변수였던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완패였다.
싱어의 셈법은 달랐다. 이후 국민연금의 찬성 결정 과정에 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개입한 사실이 수사와 재판으로 드러났다. 엘리엇은 이를 근거로 201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투자자-국가 분쟁, 즉 ISDS를 제기하고 7억7000만 달러를 청구했다. 주주총회에서 진 싸움을 국제 중재의 무대로 옮긴 것이다. 2023년 1차 판정에서 일부 승소했고, 정부의 취소소송과 환송중재를 거친 끝에 이번에 배상 판정을 확정 지었다.
2018년에는 현대차그룹도 엘리엇과 맞섰다. 엘리엇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분할·합병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이 불공정하다며 다른 주주들에게 반대를 호소했다. 의결권 자문사와 국내 기관투자가들마저 반대 쪽으로 기울자, 현대차그룹은 임시 주주총회를 여드레 앞두고 개편안을 스스로 거둬들였다. 표결조차 해 보지 못한 패배였다. 엘리엇은 이후에도 현대차에 배당 확대와 이사회 개편을 거듭 요구했다.
왜 한국은 번번이 지는가
엘리엇의 한국 성적표는 표 대결의 승패만으로 매길 수 없다. 2015년 주총에서는 졌지만 그 패배는 11년 뒤 1530억 원짜리 판정으로 돌아왔다. 싸울 무대를 바꾸고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싱어의 방식이다.
한국은 정반대였다. 정권이 바뀜 때마다 대응의 무게중심이 흔들렸고, 판정이 나올 때마다 일희일비했다. 2월의 “완승” 발표는 일곱 달 만에 머쓱해졌다. 엘리엇은 정부의 취소소송 때문에 국민 부담이 1890만 달러가량 더 늘었다고 꼬집기까지 했다. 50년을 한 사람이 이끌어 온 조직과 맞서기에는 끈기도 전략도 부족했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엘리엇은 언제나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찌른다. 삼성 건에서는 국민연금 의결권에 대한 정부 개입이, 현대차 건에서는 소액주주를 설득하지 못한 개편안의 허점이 그 약점이었다. 엘리엇이 만든 약점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드러낸 약점이다. 중재판정부는 정부 개입이 없었다면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했을 것으로 봤다. 원칙 하나가 무너진 대가가 1500억 원을 넘긴 셈이다.
엘리엇을 가리켜 벌처펀드라는 비난은 쉽다. 그러나 독수리는 쓰러진 짐승에게만 날아든다. 제2, 제3의 엘리엇을 막는 길은 소송 대응팀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고 공적 연기금의 독립성을 지키는 데 있다. 정부가 판정을 받아들인 결정 자체는 현실적이다. 더 버텨 봐야 이자만 불어날 뿐이다. 정부는 ISDS 대응 체계를 강화하는 법률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법보다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관행이다. 1530억 원은 그 교훈의 수업료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만큼, 이번 만큼은 제대로 배워야 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