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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최초로 경제이론을 수립한 人間財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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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최초로 경제이론을 수립한 人間財神

[존경받는 천상 부자들] ② 商聖 백규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중원의 주인도 바뀌어 있었다는 중국 전국시대 사람으로 나고 든 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록이 귀하다. 그 시대 부자들 얘기가 전해오는 <사기>나 <한서> ‘화식열전’에 그나마 약간의 서술이 나올 뿐이다. 주(周)나라 사람으로 위(魏)나라에서 잠시 벼슬을 했던 적이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 뛰어난 사업가이면서 경제모략가였다. 장사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오묘한 경제이론을 만들었다.


장사라는 것에 한국보다 관대했던 중국 역사에는 수많은 대상인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상성’(商聖)으로 존경하는 상인은 단 3명 뿐이다. 도주공(陶朱公) 범려와 호설암으로 불린 호광용(胡光鏞), 그리고 백규(白圭)다. 백규는 송나라 때 임금 진종이 ‘상성’(商聖)에 봉했으며 민간에서는 그를 ‘인간재신’(人間財神)이라고 부르고 신패를 만들어 공봉했다. 명성은 천하에 자자했다. <한서>는 그를 경영과 무역, 생산 등 중국 역사에서 경제 이론을 최초로 수립한 인물로 평가한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그를 ‘치생조’(治生祖), 즉 민생 경영의 비조, 상업의 조사(祖師)라고 칭송했다.
그의 경상(經商) 이론은 탁상공론이 아니었다. 깊은 식견과 현장에서의 효과가 있었다. 그는 經商은 반드시 ‘낙관시변’(樂觀時變)해야 한다”고 했다. 자주 농업 생산의 동향 변화와 시세 변화를 주의깊게 관찰해야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은 물건이 남아돈다고 생각해 내다 팔 때 그는 대량으로 사들였다. 다른 사람들은 부족하다며 사들일 때 그는 급히 필요로 하는 곳에 내다 팔았다. 오늘 날은 너무도 당연시 하는 시장경제 상업활동의 가장 기본 법칙인, ‘쌀 때 사고 비쌀 때 팔라’는 투자이론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이후 각 왕조가 시장을 만들어 교역하고 국가에서 물건을 공급하는 업무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규가 칭송받는 이유는 상업활동을 단지 자신의 치부가 아니라 국가경영이라는 큰 틀에서 봤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남는 것으로 부족한 것을 메우고 풍년에 거둔 것으로 흉년에 부족한 것을 메우고 전국 각지 물자를 서로 모자라는 곳에 지원하게 해주면 보국안민이 이뤄지고 국가는 부유해진다고 생각했다. 특정 지방에서 양잠으로 비단을 많이 생산하면 그 곳에서 부족한 곡식을 주고 제품을 구매했다. 어느 지방에서 양식이 많이 생산된다면 비단, 칠 등을 가지고 그 양식과 교환한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재화의 유통이 이뤄지면 국민경제에 유리하고 사람들이 거기에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어 나라에도 백성에게도 이롭다는 것이다. 거상답게 시기에 따른 가격 차이가 이윤의 근본임도 읽었다. 한번은 상인들이 면화를 투매해 가격이 급락하자 재고를 모두 사들였다. 후에 장마가 오래 가면서 면화 수확이 좋지 않자 비싼 가격으로 재고를 모조리 팔아넘겨 큰 이윤을 본다. 매해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예측했고 이를 매우 중시했다. 그의 연구 결과를 보자. “12년을 한 주기로 볼 때 매 3년마다 큰 변화가 있다. 앞의 3년이 풍년이면 이후 삼년은 가뭄이 든다. 가뭄 후에는 홍수가 난다. 홍수 후에는 다시 풍년이 든다. 풍년과 흉년 사이에, 곡물 가격은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대단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상업활동에 있어 ‘취여관’(取與觀)을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고 했다. 일단 기회가 오면 과감해야 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있어서는 안된다. 재산관리에서 우물쭈물하며 관망하는 것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또한 박리다매는 그의 최대 경영원칙이었다. 그 역시 이익을 추구했지만 이윤이 반드시 값비싼 상품 거래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값비싼 상품은 일반인이 구매할 수 없고 판매량도 한계가 있지만 저렴한 상품은 민중의 필수품이고 수요량이 많아 마찬가지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품질도 중시했다. 품질 좋은 상품만이 신용을 얻고 시장의 환영을 받게한다고 생각했다. 정치, 군사가 경제보다 훨씬 중요하고 지위도 높았던 시절이지만 백규는 경제를 정치, 군사와 같은 위치에 놓고 봤다. "내가 생산을 주관하는 것은 이윤, 여상이 모략을 세우고, 손자와 오자가 병법을 쓰고, 상앙이 법을 행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임기응변의 지혜가 없거나 일을 결단할 용기가 없거나 주고받는 미덕이 없거나 지켜야 할 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할 사람은 내 방법을 배우고 싶어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고관들, 권력자들은 백규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경제사상을 실행할 수 없었다. 백규는 경제를 나라를 세우고 군대를 부리고 법을 시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들과 나란히 경제를 거론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인식 수준이 일반을 뛰어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재난과 전쟁이 일상이던 시대에 투기전매, 매점매석, 값후려치기 등이 성행했고 질 나쁜 일부 거상들이 이를 통해 단기적 이익을 얻으려 했다. 그의 평전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백규는 ‘이민후재취재’(利民後再取財), 즉 ‘백성을 이롭게 한 후에 재물을 취한다’는 원칙을 평생 지켰다.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노복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질 나쁜 음식도 달게 먹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자제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면 이를 푸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백규의 최대 실수는 자신의 그 뛰어난 경험과 지식을 후대에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록으로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후대 학자들도 알아내지 못했다. 산업/IT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