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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게 쌓은 300년 富가 名門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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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게 쌓은 300년 富가 名門을 만들다

[존경받는 천상부자]⑥ 경주 최부잣집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그 시조는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이다. 정확히는 경주 최씨 가문 중에서도 12대, 300년간 부를 이어온 최진립 가문을 지칭한다. 대대손손 더럽지 않은 방법으로 부를 쌓았고 약자와 빈자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한 해 벼 1만석을 소작료를 거둬들였다. 소작료 1만석은 300만평 정도의 농지를 경작해야 가능한 규모다. 윤중로 안쪽 여의도 면적이 87만평쯤 된다고 하니 그 3.5배에 달한다.

최부잣집의 재산 형성기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다. 시조 격인 최진립 장군은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후에도 오위도총부도사, 공조 참판, 삼도 수군통제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 공으로 나라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았지만 자신은 병자호란 때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아들 최동량은 아비의 유훈인,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를 충실하게 지켰다. ‘권력을 탐하다 보면 언제 내쳐질지 모르니 이를 멀리하되 부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벼슬은 필요하다’는 상당히 적절하고 현명한 처세술이었다. 동량은 농업을 기반으로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부를 축적한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땅을 구입했고 농사를 짓는다. 경작지를 경주 외로 넓혀 울산, 영천, 경주 북부에도 그의 땅이 늘어난다. 그의 땅을 쓰고 싶어하면 수확한 곡식의 절반만 소작료로 받고 중간 관리자인 마름도 두지 않은채 위탁영농을 실시했다. 시집간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꾼도 또한 사람의 아들딸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 수고하는 날이면 음식을 주고, 어린 자식이라도 어여삐 여겨주고, 병이 들거든 집에서 간호해 주고 위엄 있게 은혜를 베풀면 일꾼이 자연 진실해지느니라(중략)”고 했다. 노비도 한 인간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대한 것이다. 노비들에게도 땅을 나눠줘 경작하게 해 그 과실을 고르게 분배, 도망가는 노비가 없었으며 서로 그 집 노비를 하려고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동학혁명이나 활빈당 의거 등 온갖 국란 때도 최부잣집은 불타지 않고 온전히 재물을 지킬 수 있었다. 노비들과 소작인들이 앞장서 막아준데다 난도(亂徒)들도 ‘최부잣집은 어떤 명분으로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지역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최동량은 일꾼들을 후하게 대접해가며 그 큰 땅을 모두 일구었다. 농사는 성공적이었고 시비법과 이앙법 등 최신 영농까지 도입해 수확량을 크게 늘렸다.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조선 땅에 몇 안 되는 만석꾼 소리를 듣게 된 것은 그 아들 최국선 때부터였다. 최국선은 1671년 조선 현종 때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빌려간 쌀을 못 갚게 되자 재촉하기는커녕 이를 안타까워 하며 담보 문서를 모두 불살랐다.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나눠주었으며 3, 4월 보릿고개엔 100석의 쌀을 이웃에게 나눠주었다. 소작 수입의 1/3을 빈민구제로 쓰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집안 전통이 되어 200년 후 13대 최준 대까지 이어진다. 최부잣집이라는 이름도 최국선 때 생겨났다.
최준은 마지막 경주 최부잣집 장손이다. 마지막 부자라니 노름이라도 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세워 운영하고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이자 기업가다. 해방 후 1949년 농지개혁법 발효를 계기로 모든 농업자본을 처분하고 대구대학과 계림대학(후에 영남대학으로 통합된다)에 전 재산을 헌납하면서 최부잣집의 300년 역사는 막을 내린다. 이 가문의 치부와 발흥은 조선 후기 농업기술과 제도 발전과 큰 연관이 있다. 소작인들에게 유리한 병작반수를 채택하고 수리시설 확충, 이앙법ㆍ우경법 도입 등을 통해 소위 ‘광작’(廣作)을 실현했다. 최씨 가문의 초기 재산축적은 농지 매입보다는 농토 개간을 통해 이뤄졌다. 양난 이후 국가가 농지 확대를 위한 개간을 적극 권장하고 개간된 농토에 대해서는 개간자에게 일정 기간 수조권을 보장해주는 정책을 펴자 최씨 가문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특히 나라가 인정한 충신 가문이란 점을 활용해 지방관청으로부터 농지 개간에 필요한 인력과 우마차 등의 장비를 지원받아 이를 대규모 개간사업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사회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고 신기술 개발과 투자에 적극 나서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올곧은 경영원칙을 수립함으로써 장기간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흉년에는 절대로 땅을 늘리지 않았고 ‘사방 백리에 죽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지켜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힘을 썼다. 최진립 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르다 병자호란 때 순국한 노비 옥동과 기별을 위해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내주는 의리의 집안이다. ‘육훈’(六訓), ‘육연’(六然), ‘가거십훈’(家居十訓) 등 스스로 절제하는 자기통제를 통해 이타의 삶을 살았던 명문(名門)이다. 천석꾼은 곳곳에 많았지만 만석꾼은 나라에서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드물었던 시대에 그 부의 규모도 놀랍지만 이를 300년 이상 이어내려왔다는 사실이 21세기 자본주의 대한민국이 그들을 주목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