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정책에 따라 조립 공장중 유일 생존
쌍용그룹에 인수되어 ‘코란도 신화’ 열어
IMF사태로 모기업 해체, 대우로 넘어갔으나
1년 만에 대우도 해체, 채권단 中기업에 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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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수출 성과를 올린 후 회사는 오히려 험난한 여정을 밟게 된다.
하동환 자동차는 1962년 정부의 자동차산업 정리계획에 따라 선정된 잠정 조립공장중 하나였다. 자동차공업보호법 부칙에 따르면, 잠정 조립공장은 1967년 12월 31일까지만 자동차를 조립 생산할 수 있었다. 하동환 자동차가 버스를 월남(베트남)에 수출한 바로 그해다. 4개월 후면 법적으로 하동환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를 만들 수 없었다.
14개 공장 중 유일하게 생존했으나 OEM업체 전락
시효 만료일이 다가오자 정부는 1967년 12월 28일 제64차 경제장관회의에서 논의한 후 1968년 1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기존 자동차 제조공장(기아산업‧신진자동차‧현대자동차‧아세아자동차)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때까지 잠정 조립공장을 선정해 한정적으로 자동차를 조립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방안 덕분에 1968년 3월 7일자로 하동환 자동차 등 11개 업체를, 같은 달 23일자로 한국 화물자동차 등 2개 업체, 4월 6일자로 화신택시 등 모두 14개 업체가 조립공장으로 재선정됐다.
그러나 1972년 1월 20일 상공부는 신진‧현대‧아시아‧]기아 등 4개 업체를 제외한 군소 조립공장의 폐쇄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이해부터 미군의 잉여물자 불하품으로 자동차를 조립했던 14개 조립공장에서 생산된 자동차는 등록이 불가능했다. 조립공장의 생존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갈 순간이었는데 유일하게 하동환 자동차는 살아남았다.
하동환 자동차는 1968년 잠정 조립공장 재선정시 정부의 권유에 따라 신진자동차와 업무제휴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양사는 전국의 버스 시장을 양분해 서울, 경기, 강원, 충청 등 5개 시도에는 하동환 자동차가 공급하되 신진의 브랜드를 붙여 판매토록 하고 그 이외의 지역은 신진이 직접 공급토록 했다. 이로 인해 하동환 자동차는 버스 부문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붙이지 못하는 주문자상표부착(OEM) 업체로 전락했지만 결과적으로 잠정 조립공장으로 재선정된 14개 업체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점에서는 행운이었다.
동아자동차 사명 변경, 특장차 업체로 변신
여건 변화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웠던 하동환 자동차는 방향을 전환하여 당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휠 디스크의 생산에 나섰다. 1970년 2월 일본의 토피공업과 기술제휴를 통해 휠 디스크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어 1971년에는 이를 일본과 동남아지역에 수출하고, 1972년 9월에는 국내 최초로 중대형 휠 디스크의 완전 국산화를 달성했다.
이 무렵 경인 및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을 계기로 건설장비 등 각종 특수차의 수요가 크게 늘었는데, 대부분 수입에만 의존한 상황이었다. 하동환 자동차는 1975년 9월 미국 더러사와 트레일러, 10월에는 일본 콩고사와 믹서트럭, 벌크 시멘트 특장차(BCC)에 대한 기술제휴를 추진해 각각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하동환 자동차는 국내에서 특장차 전문 업체로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하고, 1977년 동아자동차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동아자동차는 그러나 1981년 2월 28일 전두환 정부의 ‘자동차 합리화 조치’의 철퇴를 맞아 특장차 생산만을 전담하게 됐다. 1984년 거화 지프를 인수해 민수용 지프 승용차인 ‘코란도’를 생산, 사업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지만 2년 후인 1986년 쌍용그룹으로 경영권을 넘기면서 쌍용자동차로 상호를 바꾸어 달게 된다.
‘코란도’ 열풍으로 제2의 전성기 열었으나…

쌍용그룹 소속의 12년간 쌍용자동차는 고유 모델인 코란도 훼미리와 무쏘, 무쏘 SUV, 렉스턴, 뉴체어맨, 로디우스 등을 출시하며 나름대로의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코란도와 무쏘, 렉스턴은 쌍용차가 ‘RV명가’의 이미지를 굳힌 모델이다. 이때가 쌍용차의 제2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독일 벤츠와 엔진 기술제휴를 맺은 것은 고객이 쌍용차를 신뢰하는 원동력이었다. 비싼 벤츠를 탈 여력은 없지만 벤츠 자동차에 사용하는 엔진을 얹은 코란도로 대리만족감을 느끼게 했다. 엔진의 힘까지 좋아 SUV 매니아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수제 스포츠카를 제작하고, 트럭과 버스는 물론 최고급 세단 체어맨을 개발하며 외형 확장을 노리던 쌍용차는, 그러나 현대정공의 갤로퍼를 판매하면서 코란도 판매가 급감했고, 다른 차종들도 기대만큼 판매가 늘지 않아 재무부담이 커졌다. 설상가상으로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지자 모기업인 쌍용그룹이 부도가 나며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김대중 정부의 산업구조조정 추진에 따라 대우와 삼성간 자동차 사업 ‘빅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쌍용차는 1998년에는 대우로 회사가 넘어갔다. 그러나 1년 만에 또 다시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대우차와 함께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지정됐으며, 2000년에는 대우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대우그룹 패망 후 년 상하이기차에 매각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쌍용차에 처음으로 손을 내민 것은 중국의 란싱그룹이었다. 채권단은 2003년 12월 란싱그룹과 쌍용차 매각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4개월여 만에 매각은 무산됐고, 란싱그룹은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어 채권단은 같은 해 7월 중국 상하이기차그룹과 매각 MOU를 체결, 쌍용차는 르노 삼성, GM대우에 이어 세 번째로 외국기업의 손에 넘어갔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