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5회)]
듣기?말하기 짝 이룰 때 진가 발휘
대인 관계는 ‘서로 마음 통하는’ 것이 목적
내맘 전할 땐 ‘나’, 상대 맘 읽어줄 땐 ‘너’로
진정성은 감정?표현?내용 일치할 때 느껴져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대화에서 듣기와 짝을 이루는 것이 말하기이다. 물론, 의사소통의 기본이 듣기인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독백에 더 가깝다. 따라서 듣기는 말하기와 짝을 잘 이룰 때에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의사소통의 지름길은 듣기를 잘 하는 것, 즉 경청을 잘 하는 것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원만한 대인관계의 토대는 원활한 의사소통에서 오는 만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마음의 소리까지 읽어내는 것이 듣기의 제일 핵심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듣기만을 잘 한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잘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듣기만을 하고 있다면 상대방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는 나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물 흐르듯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또 대화의 목적이 나의 생각이나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상대방에게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말하기가 중요해진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그 마음을 헤아려주고, 동시에 내 마음을 잘 전해 서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맺는 것”은 모든 대인관계의 목적이다.
“나”로 시작하는 것이 말하기의 기본
말하기는 나의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어는 “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는 상황에서도 “너”가 주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또 딸이 늦도록 귀가를 하지 않자 아버지는 당연히 염려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일찍 귀가를 안 하는 딸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하고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마음까지 든다. 딸은 딸대로 대학교에서 친구와 선배들을 사귀기 위해 같이 시간을 보내다보니 늦게 귀가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게 된다. 이유야 어떻든 집에서 걱정하는 부모를 생각하면 늦게 귀가하는 것에 대해 미안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꾸중을 하실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담소를 떠올리며 즐거운 마음이 들기도 한 채로 귀가를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딸이 집에 와서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온다. 이 때 딸을 향해 아버지가 대뜸 “지금 몇 시냐? 뭐 하다가 이제 오냐? 이젠 대학에 들어갔다고 애비 말이 말 같지 않으냐?”고 힐난조로 말했다. 그러자 당황한 딸이 “아빠는 왜 그렇게 오버해? 내가 언제 아빠를 무시했다고 그래?”라고 약간 감정이 섞인 투로 대답하면서 이 대화는 결국 서로 큰 소리를 내면서 그동안 서로 상대방에게 쌓였던 감정을 거칠게 표현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과적으로 딸은 울면서 방으로 뛰어들어갔고, 아버지는 혼자 거실에 남아 분을 삭이느라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
왜 이 대화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결말을 보게 되었을까? 예를 든 대화에서 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째는 문장의 형태가 의문문이라는 점이다. 의문문은 답을 모를 때 그 답을 구하기 위해 하는 문장형태이다. 예를 들면, 시간을 몰라 궁금할 때 주위의 사람에게 “지금 몇 시냐?”하고 묻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정말 시간을 알고 싶어서 의문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적합한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늦게 귀가한 딸과의 대화에서 아버지가 “지금 몇 시냐?”라고 묻는 경우, 딸이 들어온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은 것일까? 만약 이 질문에 딸이 “지금 12시 25분이네요.”하고 답을 했다면 아버지의 궁금증이 해소되어 편안한 마음이 될까? 아마도 아버지는 더 화가 날 것이고 자신의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딸에게 더 험한 말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현재의 시간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늦은 귀가 때문에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문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말하기의 요체는 ‘감정토로(感情吐露)하기’
말을 잘 하는 것은 ‘내 마음을 잘 표현해서 상대방의 마음과 통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한다. 통하는 마음은 결국 감정이기 때문이다. 말을 잘 하는 공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하기는 일반적으로 “나는 너의 (이러이러한) 행동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낀다”라는 형식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형식으로 말하는 것을 훈련하고 숙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그릇된 교육을 받아왔다. 특히 남자의 경우에는 어렸을 때부터 감정 표현을 더 자제하고 억압하도록 훈련받았다. ‘남자는 일생동안 세 번만 울어야한다’라든지 ‘너는 계집애처럼 왜 자꾸 질질 짜냐?’ 이런 교육을 받고 성장하며 자연히 자신의 감정에 대해 둔감해지고, 그나마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억제하게 된다. 그 결과 감정이 표현되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 번에 크게 폭발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평소에 별 말이 없고 조용하던 사람이 한번 폭발하면 무섭게 변하는 것도 다 같은 이치이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비난하거나 섭섭해 하기 이전에 과연 나는 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를 주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대화를 하면 쓸데없는 부작용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진정성’이 통(通)한다.
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성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표현하는 내용이 일치할 때”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경우 내가 느끼는 감정과 내 역할에서 요구하는 표현이 다fms 경우가 종종 있다. 또는 자존심이 상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느낄 경우에는 감정과 표현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식이나 정보는 맞고 틀리는 것이 있지만, 감정은 맞고 틀리는 것이 없다. 그저 느껴지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면 된다. 이 사람이 말을 잘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