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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창포원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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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겨울 창포원 산책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다행히 부스터 샷을 맞았다. 연일 수천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와중에 코로나를 피해 부스터 샷까지 접종을 마친 것이다. 주사를 맞은 부위에 약간의 통증이 남아 있을 뿐 별다른 후유증은 없다. 그 또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가장 두렵고 조심스러운 탓에 연말의 많은 모임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지레 몸이 떨려온다.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묻는 일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커다란 바윗덩이를 가슴에 얹고 사는 것처럼 답답하다. 이도 저도 어찌할 수 없을 때 내가 가장 쉽게 택할 수 있는 일이 산책이다. 산책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걷는 것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갈 곳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냥 지치도록 걷다가 돌아오기도 하는데 그 또한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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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외기가 냉랭한데도 산책로엔 제법 많은 사람이 걷고 있다. 많은 사람이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걷기가 우리의 삶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건강해지고 지혜도 덤으로 온다. 걷는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말과 이음동의어에 가깝다. 천변에 무성하던 한해살이풀들은 바짝 말랐고 머리를 푼 흰 억새꽃이 찬바람을 타고 있다. 어로에 떼를 지어 날아들던 가마우지도 보이지 않고, 몇 마리의 물오리만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있다. 쓸쓸하지만 평화로운 풍경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리 난간에 기대어 물속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맑은 물속에 팔뚝만 한 잉어들이 떼를 지어 헤엄치고 있다. 우두망찰. 한참을 넋 놓고 잉어를 바라보다가 이내 발길을 돌려 다시 걷는다. 문득 창포원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천변 산책로를 벗어나 창포원으로 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린다. 붉은 신호등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은 머지않아 파란 불로 바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 견딜 수 있게 한다. 겨울은 모든 생명에게 엄혹한 견딤의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봄이 올 것이란 단단한 믿음으로 이 추운 계절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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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창포원은 적요하다. 꽃들은 사라지고 산책로에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억새꽃 핀 언덕과 스트로브 잣나무 숲길과 붉은 열매가 촘촘히 매달린 산수유나무 아래를 천천히 걷는다. 멀리 바라보이는 도봉의 흰 이마가 햇살을 받아 유난히 환하다.

꽃창포와 부처꽃이 피어 있던 수변 데크를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 초록 잎을 달고 있는 일군의 관목이 눈에 들어왔다. 골담초다. 낙엽관목인데 이 엄동설한에 초록 잎을 달고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상기온 탓인 듯하여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활엽수들이 잎을 모두 떨군 한겨울이 되어서야 초록을 자랑하던 겨우살이가 생각난 것도 그때였다. 겨우살이는 상록성 반기생식물로 참나무나 밤나무, 벚나무 같은 활엽수에 기생하는데 나뭇잎에 가려 잘 눈에 띄지 않다가 잎이 진 겨울에야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 보인다. 3월에 꽃을 피우지만, 늦가을이 되어서야 익는 노란 열매가 더 눈에 잘 띈다. 겨우살이 열매는 새들의 귀한 겨울 양식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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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고단한 그대여 하루하루/ 겨우 산다고 말하지 마라/ 나목 앙상한/ 참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혹독한 겨울밤 의연히/ 지새는 겨우살이를 보라// 매운 겨울바람 속에서/ 황금빛 찬란한 열매를 잉태한/ 겨우살이는 결코 겨우 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칼바람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치열한 꿈을 놓지 않는다” 원영래 시인의 시 ‘겨우살이’의 일부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어느 때보다도 혹독한 겨울이지만 칼바람 맞으면서도 꿈을 놓지 않는 겨우살이처럼 의연히 봄을 향해 걸어가자.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