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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북한산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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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북한산에 올라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심코 눈에 들어온 북한산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희끗희끗한 눈을 묻힌 채 우뚝 서 있는 북한산은 말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였다. 미술평론가 오주석이 옛 그림 가운데 가장 웅혼하고 장엄한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꼽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능가하는 거대한 진경산수화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감동이라니! 화가라면 응당 붓을 들어 그 감동을 화폭에 담았겠지만 그런 재주가 없으니 직접 산을 오르며 그 감동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게 최선이다 싶었다. 내가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의 추위와 눈길의 미끄러움을 무릅쓰고 허위허위 북한산을 오른 이유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으나 매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곤 한다. 서울의 북단에 자리한 도봉구에 사는 까닭에 북한산과 도봉산은 눈만 뜨면 바라보는 정겨운 산이다. 누군가는 산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산의 품에 안겨본 사람이라면 바라보는 순간, 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어찌하지 못하고 서둘러 배낭을 챙기게 된다. 한국 100대 명산 산행기인 “산에서 만든 튼튼한 허벅지가 낫다”를 쓴 필자는 “산은 주기만 할 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산은 가진 것을 전부 내어주며, 거기에 정신까지 맑게 해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산을 오르면 건강도 챙길 수 있고 정서적 안정감과 더불어 일상에 지친 심신의 힐링까지 얻을 수 있으니 산을 찾는 사람이야말로 복 받은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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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을 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도선사 입구까지 오르는 데에도 벌써 숨이 차다.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 더한 탓인가.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시에서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라며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했는데 세월을 비켜가는 비결은 어디에도 없는 모양이다.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이 청춘이라 강변해도 산을 오르다 보면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하루재를 오르는 동안 서서히 동이 터오며 동쪽 하늘 구름 사이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눈이 쌓인데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등산객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산중은 고요에 휩싸여 있다. 아직 아침 햇살이 닿지 않았음에도 나무와 풀, 바위와 돌멩이에도 빠짐없이 눈꽃, 서리꽃이 피어 말 그대로 환한 적막이다. 어디선가 큰오색딱따구리 한 마리가 날아와 고목을 쪼아대며 적막한 산중의 고요를 흔들어 놓는다. 마치 아침 예불 올리는 스님의 목탁 소리처럼 명랑하고도 경건하여 산천초목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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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


처음부터 백운대에 오를 생각은 아니었다.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836m)는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오르기 쉽지 않은 산인데 눈까지 덮인 설산을 오르는 것은 젊은 사람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상까지 올라간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눈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를수록 시야는 넓어지고 시각 또한 달라지게 마련이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컸다. 어렵사리 백운대에 올랐지만 그 수고가 아깝지 않을 만큼 바람과 구름이 빚어낸 상고대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정상에 올라 흰 눈에 덮여 굽이치는 산맥과 산 아래 펼쳐져 있는 서울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새해의 소망과 다짐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산에 오른 것처럼, 내게 주어진 삼백예순날을 뚜벅뚜벅 걷다 보면 또 한 해의 끝에 닿게 될 것이다. 무탈하게 산에 오른 것에 감사하듯 평온한 일상에 감사하고, 산정에서 만난 상고대처럼 일상 속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고 사랑하겠노라고.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