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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큰물이 지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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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큰물이 지나가셨다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큰비 지나간 개천은 가리워진 곳 없어서 마름풀들은 얽히었다/ 작은 소에서 놀던 물고기들은 소식 없이 흩어졌다/ 들길에는 띠풀이 다보록해졌다/ 무너진 고랑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맛살에 주름이 들었다/ 젖은 집으로 어물어물 돌아가는 저녁 거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큰물이 나가셨다, 했다.” -문태준의 ‘큰물이 나가셨다’ 전문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하던 태풍 ‘카눈’이 지나갔다. 구름 사이로 조각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기상 관측 이래 최초로 한반도를 종단한 특이한 이동 경로를 가진 '카눈'은 느린 이동 속도와 많은 비구름을 품고 있어 큰 피해가 예상된다는 기상예보가 있었다. 태풍 이전엔 한 차례 물난리를 겪은 뒤라서 잔뜩 겁을 먹었었는데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지나간 것이다. 십수 년 전, 어머니와 고향에 살 때 어머니는 큰물이 지나가고 나면 집 앞 개울가에 나가 물 구경을 하며 ‘큰물이 지나가셨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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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종일토록 퍼붓던 빗줄기가 잦아든 저녁 무렵, 이른 저녁상을 물리고 어머니와 나란히 개울가에 나와 물소리를 들었다. 여름내 개울을 무성하게 덮고 있던 고마리 풀들이 거센 물살에 다 떠내려가고, 붉정물이 할퀴고 간 흔적들을 살피며 어머니는 독백처럼 그렇게 중얼거리시곤 했다. ‘큰물이 나가셨다’는 어머니의 말씀 속엔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큰물이 지나갈 때가 있으니 견디거라, 곧 괜찮아질 거다, 하는 묵언의 타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무척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당시엔 그 말씀의 의미를 새겨듣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고 나니 이제 조금씩 이해가 된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모나고 뾰족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에 관심을 두고 야생화에 마음을 준 것도,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 안으로 큰물이 지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오물들이 비에 쓸려 가듯이 내 안의 악취 나는 생의 찌꺼기들이 고통이란 큰물을 지나오는 동안 여과되어 낡아졌을 것이다. 아직도 버려야 할 게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만큼이라도 유순해지고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으로 큰물이 지나가신 덕분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을 결딴낼 듯 퍼붓던 폭우도 어느 정도 쏟아진 후엔 그치게 마련이고, 푹푹 찌는 가마솥더위도 가을바람 앞엔 속절없이 무릎을 꿇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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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느닷없이 ‘마음에 꽃을 심다’ 북 콘서트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마음에 꽃을 심다’는 이곳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 중에서 골라 2년 전에 출간한 책이다. 뒤늦게 북 콘서트를 하자는 게 다소 뜬금없기는 해도 기분 좋은 일임엔 틀림없다. 이처럼 우리네 삶 속엔 갑자기 진로를 튼 태풍처럼 예측 불가의 돌발 변수가 도처에 숨어 있다. 장마 중이라도 이따금 비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언뜻 비치듯 힘든 시간 속에도 희망은 들어 있게 마련이다. 수해를 입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웃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이 힘든 시간을 함께 잘 넘겨야겠다.

큰물이 지나가듯 이제 입추도 지났고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도 멀지 않다. 곧 가을이 손님처럼 찾아올 것이다. 농부들은 서둘러 논밭의 터진 둑을 고치고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비바람을 견딘 열매들은 가을 햇살 아래 더욱 탐스럽게 익어가며 달큰한 향기를 풀어놓고, 쪽빛 하늘은 하루가 다르게 키를 높일 것이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계절은 모퉁이를 돌아 고추잠자리 떼 날아와 하늘을 맴돌고, 밤 깊으면 풀벌레 울음소리 그윽하게 들려올 것이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