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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파만파] 항저우가 갖는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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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파만파] 항저우가 갖는 역사적 의미

역사가들은 1259년을 주목한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세계화’의 첫걸음이 시작된 해다. 몽골 제국의 4대 칸 뭉케(재위 1251년~1259년)는 대담하게도 남송(南宋)과 중동(中東) 두 곳을 향해 동시에 대규모 원정대를 보냈다.

칭기즈칸 연구가 잭 웨더포드는 “2차 대전 때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이기 이전 어떤 군대도 이런 모험을 시도한 적 없었다”며 뭉케의 야망을 높이 평가했다.
당시 남송의 수도는 항저우였다. 남송 원정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물의 벽’ 양자강은 몽골의 기병들에겐 바다나 마찬가지였다. 최강의 지구력을 자랑한 몽골 말이었지만 건너뛰기에 양자강은 너무 넓었다.

또 하나는 기후와 모기였다. 몽골 병사들은 끈적거리는 날씨와 모기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모기가 전파하는 전염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남송 원정의 선봉은 쿠빌라이(재위 1260년-1294년)였다. 양자강을 건너온 그의 발길을 붙잡은 것은 뭉케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쿠빌라이는 동생과 ‘형제의 난’을 치른 끝에 몽골의 5대 칸에 올랐다.

할아버지 칭기즈칸은 갓 태어난 그를 안고서 “이놈 봐라. 꼭 중국인을 닮았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쿠빌라이에게 중국은 숙명과도 같았다. 그에게 남겨진 칭기즈칸의 마지막 유언은 “중국(남송)을 정복하라”였다.

남송의 황제 자리는 막 도종에서 공제로 넘어갔다. 공제의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남송의 실권은 재상 가사도가 쥐고 있었다. 가사도는 조정의 모든 일을 쥐락펴락했다. 궁궐의 실력자에게 어리고 나약한 왕만큼 바람직한 조건은 없었다.

가사도는 어린 황제를 핍박하는 일에는 능했지만 정작 국정 운영에는 미숙했다. 남송의 마지막 황제는 몽진 길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의 나이 고작 일곱 살이었다.

쿠빌라이 치세 원나라는 거대한 교역 국가였다. 그 중심은 항저우였다. 그곳의 항구에는 향신료와 설탕을 가득 실은 인도 배가 들락거렸다. 유럽으로 비단 제품을 실어 나르는 한편 페르시아의 양탄자를 수입했다.
항저우에는 큰돈을 번 유럽 상인들이 많았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항저우로 들어오는 후추의 양이 일일 4만 5000㎏이라고 소개했다. 인도에서 유럽으로 수입되는 양의 100배였다.

항저우를 방문한 유럽인 오도리코는 “기독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가 이 거대한 도시에서 함께 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인종이 한 권력의 통제 아래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가장 위대한 놀라움 가운데 하나다”라고 기술했다.

중국의 6대 고도(古都) 항저우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지난달 23일 개막일 연회에 참석해 ‘아시아의 운명 공동체’를 강조했다. 미·중 대결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가운데 아시아에 방점을 두었다.

중국이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무언지를 압축한 말이었다. 중국은 이번 대회 메달 수상자에게 ‘석과누누(碩果累累· 씨 과일이 결실을 맺다)’라고 적힌 도자기를 선물하고 있다.

석과를 중국이라는 말로 대신해 보면 흥미롭다. 도광양회(韜光養晦·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린다)를 벗어나 활보하겠다는 대국의 의지가 읽혀진다. 그러나 ‘석과불식(碩果不食·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이라는 주역의 옛 교훈을 잊은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씨 과일이 탐난다고 몽땅 먹어버리면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IMF 사태 이전 우리에게도 ‘샴페인을 미리 터트렸다’는 경고가 있었다. 그를 외면하다 결국 뼈아픈 국가 부도 사태를 겪어야 했다. 훅 가는 건 한순간이다.


성일만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texan509@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