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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단풍 드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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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단풍 드는 시간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시월이 왔다. 설악산의 단풍 소식과 함께 시월이 온 것이다. 추석 성묫길에 보았던 보랏빛 쑥부쟁이와 분홍 며느리밥풀꽃, 물이 잦아든 천변에 다보록이 피어 있던 자잘한 고마리꽃들과 바람을 타는 코스모스의 춤사위가 조금씩 경쾌해지는 사이, 누구나 살고 싶은 시월이 온 것이다. 쨍한 갈맷빛 하늘가로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흰 뭉게구름만 보아도 가을은 이미 깊어졌음을 느낄 수 있지만, 진정 가을을 가을답게 해 주는 것은 단풍이 아닐까 싶다. 옛 시인은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라 하여 낙엽 하나로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안다고 했다.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 온산을 붉게 물들일 때 가을은 절정에 이른다. 누군가의 말처럼 ‘가을은 물드는 계절’이다.

차례를 지내고 고향 집을 둘러보는데 올해는 감나무 가지에 감이 듬성듬성 성글게 달렸다. 지난해만 해도 가지가 휘어지도록 다닥다닥 열렸었는데 올해는 아마도 감나무가 해거리를 하는 모양이다. 해거리는 격년결과(隔年結果)라고도 하는데 과실수에 과일이 많이 열리는 해와 아주 적게 열리는 해가 교대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한해 풍성하게 열매를 맺느라 애썼으니 다음 해에는 잠시 성장을 멈추고 수고한 뿌리와 줄기를 쉬게 해주려는 나무의 생존전략이다. 해거리는 나무 자신을 위한 쉼의 지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열매를 먹고 사는 짐승의 개체 수를 조절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새삼 자연의 이치는 알아갈수록 경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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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하러 선산을 오르는 길, 늘 앞장을 서시던 삼촌은 올해 들어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빠지시고 조카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정년퇴직 후 고향에 내려와 사는 형도 다리가 불편하여 저만치 처져서 뒤를 따르고 대신 젊은 조카들이 앞장을 서 걷는다. 아직은 산을 오르는 게 힘에 부치지 않아 조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도 이제 나에게도 가을이 도찾아왔음을 직감한다. 숲에 오면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유난히 숲을 좋아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학자들은 ‘바이오필리아(biophilia)’ 때문이라고 한다. 바이오필리아는 ‘바이오(bio·생명)’와 ‘필리아(philia·사랑)’ 두 단어를 합친 말로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인간의 본능을 이르는 말이다. 이 용어는 에리히 프롬이 생명에 끌리는 인간의 본능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굳이 바이오필리아와 같은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동경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틈만 나면 자연의 품에 안기고자 숲을 찾는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휴식은 더없이 달콤하지만 늘 푸른 듯하나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은 자연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한증식만을 꿈꾸는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욕망에 눈이 어두워 해거리하는 나무의 지혜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에 맞추어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잎을 떨구는 자연의 이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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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사계절을 살아가듯 유한한 목숨 지닌 우리 인간은 누구 하나 생로병사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집 앞 벚나무 가지에 물든 잎이 하나둘 눈에 띈다. 머지않아 온산이 단풍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이제 내게도 가을이 찾아왔으니 가장 찬란하게 아름답게 물들어야겠다. 그리고 물든 잎을 다 내려놓고 겨울을 나는 나목처럼 욕심을 미련 없이 내려놓아야겠다. 해거리하는 감나무처럼 그동안 애쓰며 살았으니 이제 남은 날들 속엔 적절히 쉼표를 찍어가며 살아야겠다. 새들이 날아간 하늘에 피어난 털구름이 노을에 곱게 물들어간다. 하늘 끝에서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일찍 물든 벚나무 잎 하나 허공을 맴돌다 나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마치 내게 “이제 단풍 들 시간이야!”라고 속삭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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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