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

글로벌 공급 과잉, 중국과 중동의 설비 증설 경쟁, 강화되는 탈탄소 규범이라는 삼중고가 한국 석유화학의 경쟁력을 뿌리부터 흔든다. 특히 울산, 여수, 대산 등 주요 산업 지역의 위기감은 국가 제조 기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과거의 성공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 '회복' 같은 단기적 처방이 아닌, 산업 생태계 전체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생산 효율 증대나 비용 절감만으로는 거대한 변화를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산업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만 생존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이는 미래 산업 지형을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다.
이러한 전환기의 해법은 '수소'에 있다. 수소는 단순한 청정에너지를 넘어선다. 산업의 핵심 연료이자 화석 기반 원료를 대체할 궁극적인 전략 자산이며, 한국 수출 산업을 재구조화하고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할 열쇠이기도 하다. 수소는 탄소 중립 사회 전환의 필수 요소이자 고부가가치 산업을 창출할 잠재력을 지닌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 변화 대응을 동시에 해결할 유일한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수소는 고온 열원 대체로 공정상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나아가, 화석 기반 원료를 탄소중립적인 원료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수소 기반의 e-나프타(e-naphtha), 합성 메탄올, 암모니아 등은 수소화학 산업의 새로운 고부가 먹거리가 될 수 있다. 이들 품목은 국제 시장에서 기술 우위와 탄소 감축 기여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출 경쟁력을 확보할 전략적 품목으로 부상할 것이다. 이는 기존 제품의 대체가 아니라, 고부가가치 창출을 통한 산업 생태계의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수소 중심의 산업 전환에 있어 울산은 국내 최적지다. 울산은 국내 최대 수소 배관망, 원활한 물류 항만 시설, 세계적인 중공업 기반시설을 갖췄다. 또한, 석유화학 공정 부생수소 생산 및 정제 기술, 수소 모빌리티 실증 경험과 인프라를 축적했다. 이는 '제로에서 시작하는 수소산업'이 아니라, 기존 견고한 산업기반 위에 '진화형 수소산업'을 건설할 최적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울산은 이미 수소 시대에 한 발짝 다가서 있으며, 숙련된 인력과 축적된 기술력 또한 큰 자산이다.
나아가, 울산, 포항,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해오름동맹'은 수소 전환을 위한 기능적 연대 구조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울산은 풍부한 부생수소 생산 역량과 수소 모빌리티 인프라 구축의 선두 주자이다. 포항은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및 수소 저장 소재 분야에서, 경주는 소형모듈원자로(SMR)를 활용한 청정수소 생산 및 R&D 테스트베드로서 기능한다. 이들 지역의 유기적인 협력은 시너지를 창출하여 대한민국 수소 경제를 견인할 것이다.
여기에 미래를 향한 또 하나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바로 북극항로의 시대이다. 기후 변화로 북극항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러시아발 LNG는 물론, 유럽과 북미 등지에서 생산될 청정 암모니아 및 수소의 동북아시아 유입 경로로도 이목이 집중된다. 이 거대한 미래 에너지 흐름 속에서 울산항은 북극항로와 동북아시아 수소 회랑을 잇는 '수소 환승 허브'로서 전략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울산이 글로벌 수소 물류의 핵심 교두보로 성장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수소는 울산, 그리고 대한민국 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문이며, 동북아 수소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울산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