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미지 확대보기대한민국은 수출로 성장한 나라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지만, 그 수출의 동맥인 항로와 에너지 구조를 우리 손으로 직접 설계해본 경험은 거의 없었다. 전후 복구와 산업화의 파고 속에서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에 바빴다. 원유와 LNG는 정해진 바닷길을 따라 들어왔고, 전력은 거대 발전소에서 중앙집중형 계통을 타고 수도권으로 일방향적으로 흘러갔다. 이 구조는 과거 고도 성장기에는 효율적이었으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그 효율은 오히려 국가의 발목을 잡는 취약점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미 전력망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송전선 건설은 극심한 사회적 갈등에 가로막혀 있다. 글로벌 공급망 역시 전쟁과 제재, 주요 해협의 봉쇄 위협 앞에서 요동친다. 과거의 효율만을 좇던 선형적 구조가 더 이상 국가 안보와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국토를 단순한 물리적 행정 공간으로 보아서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항로와 에너지, 산업과 금융을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로 엮는 ‘국토 경영’만이 해법이다. 부산으로의 금융 허브 이동 역시 단순한 균형발전 차원의 시혜가 아니라, 생산과 금융이 현장에서 결합하도록 만드는 국토 전략 재설계의 첫 단추로 해석해야 한다.
북극항로는 더 이상 상징적 구호가 아니다. 지구 온난화로 항해 가능 기간이 늘어났고, 우리 조선업 기술력이 집약된 쇄빙 LNG 운반선들은 이미 상업 운항의 궤도에 올라섰다. 기존 수에즈 운하 경유 경로보다 운송 거리는 약 40%, 항해 시간은 열여드레 안팎까지 단축된다. 이는 단순한 물류비 절감을 넘어선 대전환이다. 관건은 개통 시기가 아니라 ‘누가 먼저 활용 구조를 설계하고 주도권을 선점하느냐’에 있다. 항로 다변화는 호르무즈와 말라카 해협에 집중된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강력한 보험 장치이자, 국가 비용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생존 전략이다.
이 변화 앞에서 동해는 새로운 전략 공간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북극에서 내려오는 에너지와 화물이 어디에서 하역되고 전환되며 소비되는지가 새로운 국부의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울산·포항·경주를 잇는 ‘해오름동맹’은 단순한 항만 집적지가 아니다. 울산의 에너지 전환 거점 기능, 포항의 이차전지와 첨단 제조 역량, 경주의 차세대 에너지 연구 인프라가 결합된 이곳은 유입된 에너지를 즉각 산업 원료로 바꾸어 소비하는 거대 전환 플랫폼이다.
대부분의 항만이 화물 처리에 집중할 때, 해오름은 에너지를 수소와 암모니아로 전환해 철강·화학 공정에 투입하고 전력을 인근 산업단지에 즉각 공급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생산지와 소비지가 맞물리는 이 순환 구조는 중앙 계통의 부담을 줄여 막대한 송전망 투자 비용을 절감시킨다. 동시에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글로벌 탄소 규범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산업 체질을 만든다. 이는 지역 개발 논리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수출 경쟁력을 지키는 국가적 전략 자산이다.
여기에 금융이 결합될 때 항로와 에너지는 비로소 움직이는 자산이 된다. 인프라는 안정적 현금 흐름을 창출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스의 기초 자산으로 구조화될 수 있다. 전제 조건은 ‘에너지·항로 통합 관제 역량’이다. 기상, 안전, 수급, 보안 체계가 하나로 통합 관리되어야 국제적 신뢰가 생기고 글로벌 자본이 유입된다. 관제는 단순한 안전장치가 아니라, 신뢰라는 가치를 입혀 자본을 끌어들이는 지식 서비스이자 운영 인프라다.
국토 재배치 과제 역시 이 맥락에서 풀어야 한다. 전력 다소비 산업과 데이터센터를 수도권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시스템 과부하를 감당할 수 없다. 에너지가 생산되는 인근으로 산업을 유도하는 것이 국가 효율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해오름동맹은 그 변화를 증명할 실증 무대이며, 동해안 철도와 에너지망이 북방으로 연결되는 날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북방 경제권의 핵심 앵커가 될 것이다.
산업화 60년은 앞서간 이들을 뒤쫓는 추격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구조를 설계해야 하는 설계자의 시간이다. 국토를 전략 자산으로 경영하며 보이지 않는 항로와 에너지망을 입체적으로 설계하는 국가만이 미래를 주도한다. 해오름동맹은 대한민국이 추격자의 옷을 벗고 글로벌 설계자로 거듭날 수 있음을 증명할 가장 강력한 무대다. 이제 우리는 국토를 경영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항로를 설계하는 국가가 나아갈 명확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