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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에너지정책은 4지 선다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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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너지 톺아보기] 에너지정책은 4지 선다형이 아니다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이미지 확대보기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우리는 오랫동안 정답을 잘 찾아내는 사람을 인재라고 불러왔다. 학교에서는 네 개의 보기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훈련을 반복했고, 사회에서도 주어진 선택지 중 무엇이 옳은지 잘 골라내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에너지정책에서도 우리는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 중앙집중형이냐 분산형이냐, 전기냐 수소냐를 놓고 우리는 오랫동안 소모적인 대립을 이어왔다. 마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오답인 양 이분법적 잣대를 대곤 했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객관식 시험지와 전혀 다르다. 독일의 경험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야심 찬 에너지전환(Energiewende) 정책을 추진해 온 국가다. 재생에너지를 파격적으로 확대했고 2023년 4월에는 마지막 원전 3기의 가동을 전면 종료했다. 독일 연방네트워크청(BNetzA) 집계에 따르면 2024년 전체 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비중은 59%에 달했다.

따라서 독일의 상황을 단순히 ‘재생에너지의 실패’라는 단편적 프레임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진짜 문제는 ‘에너지 시스템 전체의 조합’과 ‘전환의 순서’에 있었다. 독일은 원전과 석탄을 줄여가는 과정에서 천연가스를 핵심 전환 연료(Bridging Fuel)로 선택했고, 그 가스의 50% 이상을 특정 국가(러시아)의 파이프라인 가스(PNG)에 의존했다.

경제성이 뛰어난 러시아 가스가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는 전제하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였으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충격은 게임의 전제조건을 송두리째 바꿨다. 지정학적 상호의존이 정치적 신뢰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후 독일은 신속하게 부유식 LNG 재기화 터미널(FSRU)을 구축하고 노르웨이·네덜란드·벨기에 등으로 공급선을 다변화했다. 2024년 기준 독일 가스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노르웨이가 담당할 만큼 빠른 위기 대응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시스템 불균형이 초래한 대가는 혹독했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2월부터 2026년 상반기까지 에너지집약 산업의 생산은 15% 이상 감소하며 전체 산업 생산 감소율(9.5%)을 크게 상회했다. 치솟은 에너지 비용이 제조업의 뿌리를 흔든 것이다.

반면 같은 유럽의 프랑스는 다른 길을 택했다. 프랑스 역시 재생에너지를 꾸준히 늘렸으나, 기존 원전을 재생에너지와 대립시키지 않고 유연하게 결합했다. 원전·수력·풍력·태양광의 정교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국경을 넘어선 광역 전력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2024년 프랑스 전력 생산의 95%가 원전과 재생에너지로 구성된 저탄소 전력으로 채워졌다. 원전 발전량은 360TWh 수준으로 회복됐고 재생에너지 발전량 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나아가 프랑스는 같은 해 사상 최대 수준인 89TWh의 전력을 이웃 국가에 순수출하며 에너지 안보와 수익성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차이를 단순한 ‘재생에너지 대 원전’의 대결 구도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4지 선다형 시험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진정 뛰어난 전략가는 상대가 그어놓은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보다는 게임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새로운 선택지를 창출하여 판도를 주도하는 자가 승리한다.

대한민국의 에너지정책에서 원전과 재생에너지, 수소와 LNG, 중앙집중형 전력망과 분산에너지, ESS와 VPP를 대립시킬 이유가 없다. 각 기술의 강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역할을 부여하고, 이를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결합해야 한다. 여기에 송전망 확충, 항만 및 저장 인프라, 공급망 리스크 관리, 그리고 AI 기반의 실시간 전력 제어망까지 통합해야 비로소 완결성이 확보된다.

에너지안보는 자원 확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공급망의 회복탄력성, 기술주권, 국제 규범 수립, 외교적 통찰력, 그리고 사회적 합의라는 거버넌스가 단단히 매개되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연료나 기술, 혹은 선택지의 종류가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미 주어진 보기 중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하며 새로운 판을 짜는 ‘아키텍트(Architect·설계자)’의 시각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정답을 고르는 수동적 국가에서 벗어나, 글로벌 에너지 안보와 산업의 판을 직접 설계하는 전략 국가로 거듭나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