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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시작, 새로운 삶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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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시작, 새로운 삶의 가능성

[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26)]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사유해서 그 해답을 찾아내는 것

그루에게!

벌써 수능이 코앞이구나. 교정 목련 꽃망울이 움트던 3월이 생각난다. 그때 새 학년이 시작되는 긴장감과 새로운 각오로 반짝이던 너의 눈망울이 목련꽃처럼 피어났었지. 그런데 벌써 그 긴긴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며 노력했던 배움의 결실을 맺어야 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제일 먼저 등교해서 밤늦게까지 배움에 정진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그루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수확할 거라고 확신해.

오늘은 그루가 매일 골머리를 싸매며 대하는 ‘문제’와 ‘해답’에 대해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과 그의 철학을 이어받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라는 철학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들려줄게. 그루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어. 들뢰즈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라는 철학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사유(생각)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어. 그는 사유가 새롭게 시작될 때만이 삶이 변화한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려면 사유를 시작해야만 가능한 거지.

들뢰즈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논하고 있는 책인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사유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고 있어. 이 소설은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를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의 맛에 의해 기억이 상기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마르셀은 긴 이야기를 거쳐 스스로의 문학적인 사명을 깨닫는데 이 과정을 들뢰즈는 ‘습득(apprendre/apprentissage)’이라고 해. 이 습득은 ‘기호(signe)’ 해독방식의 습득을 가리켜. 마르셀은 마들렌의 맛이라는 기호에 의해 과거를 떠올렸을 때 기묘한 ‘기쁨’을 느끼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그렇지만 그는 최종적으로 기호의 해독방식을 배우고 이 ‘기쁨’의 비밀을 이해해. 그는 단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해독하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최종적으로 어떤 삶의 진리에 도달해.

그런데 기호는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기호는 우연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대상이야. 그리고 기호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강한 작용(강제/폭력)을 해. 이 강한 작용에 의해서 사람은 사유하기 시작해서 진리에 도달해. 사람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게끔 되는 거야. 사람은 현상의 변화에 관계하는 무언가를 받아들였을 때 사물을 생각해. 그런 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변화와 단절될 수 없어.
고레에다 히로카즈(Koreeda Hirokazu, 1962~)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 2013)>이미지 확대보기
고레에다 히로카즈(Koreeda Hirokazu, 1962~)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 2013)>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 그루가 좋아하는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이해하기가 좀 쉬울 거야. 현대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인 고레에다 히로카즈(Koreeda Hirokazu, 1962~)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 2013)>를 보면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건설회사에서 잘 나가는 비즈니스맨인 ‘료타’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들을 둔 행복한 가장이야. 그런데 6년 전 아들이 태어난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연락이 와. 아이가 바뀌었다는 이 한 통의 전화가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를 강제하는 ‘기호’야. 그 기호는 료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연적으로 그의 삶에 주어지는 사건이야. 그리고 그가 새로운 사유를 시작하도록 폭력적으로 강제하게 돼. 물론 료타가 이 사실을 알고 바로 새로운 사유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야. 들뢰즈의 말대로 기호란 해독 방식을 배우지 않으면 습득될 수 없기 때문이야. 영화는 료타가 진정한 아버지로 거듭나기 위해 겪는 기호 해독의 지난한 실패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의 삶을 어떤 진리에 도달하도록 이끌어. 그 실패의 과정이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배움’의 과정이야.

료타의 삶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삶이야. 회사에서는 상사로부터 인정받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원이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생활을 누려.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아들을 둔, 누구나 부러워할 가족의 가장으로서 가족들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우러러봐. 아마 아이가 바뀌는 사건이 없었으면 별다른 변화가 없는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는 삶을 료타는 살았을 거야. 이런 삶을 ‘습관에 따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사람이 습관 속에 살게 되면 사유는 시작되지 않아. 습관에 따른 삶은 새로움이 전혀 없는 반복의 연속이기 때문이야. 차이 없는 반복이지.

습관의 반복을 깨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기호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사유를 시작할 때야. 아이가 바뀐 사건은 료타에게는 기호와의 만남이며 평화로운 습관적 삶을 깨는 폭력으로 작용하지. 그렇지만 그 사건을 통해 료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호를 해독하기 위해 새로운 사유를 시작해. 사람은 자신의 삶과 어긋나는 어떤 것에 대응하면서 무언가를 배우게 되는 거야. 따라서 기호와의 만남은 ‘다른 것’과의 만남으로 행해지는 습득이나 배움의 과정과 분리될 수 없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우리는 헤엄치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수영에 관한 논문에 의해 배워서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흐르는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뿐이다.”라고 했어. 들뢰즈도 우리가 모래 위에서 재현하는 수영지도원의 동작은 실제로 파도를 피하면서 헤엄치려고 할 때에는 무력하다고 쓰고 있어.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체험하면서 배울 수밖에 없는 거야.

사실 료타의 평화로운 삶의 이면에는 갈등이 잠재되어 있어. 아들 케이타는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료타가 원하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해. 유치원 피아노 발표회에서 다른 친구의 발표를 보고 케이타가 “잘하지?”라고 했을 때 료타는 “케이타, 넌 분하지 않아? 더 잘 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계속해도 의미가 없어.”라고 말해. 료타는 승부욕이 없는 케이타를 못마땅해 해. 아내 미도리는 케이타를 경쟁으로만 내몰면서 단점만을 보는 료타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사회적 성공에 눌려 자신의 생각을 마음속에만 담아둬. 료타는 자신의 성공에 취해 휴일에도 일에 매달려 케이타와 놀아주지도 못해. 미도리는 그런 남편이 불만이지만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아. 하지만 아이가 뒤바뀌는 사건으로 인해 이런 불만들이 표면으로 솟아오르고 이 낯선 것(기호)들이 료타에게 사유하기를 강요해.

그렇다면 기호의 해독방식은 어떻게 습득되는 것일까? 들뢰즈는 “우리는 ‘나와 마찬가지로 하시오[fait comme moi]’라고 말하는 자로부터는 무엇도 배울 수 없다. 우리에게 유일한 교사는 우리에게 ‘나와 함께하시오[fait avec moi]’라고 하는 자이고, 이 교사는 우리가 재현하도록 몸짓을 제공하는 대신 이질적인 것 속에서 전개하도록 몇몇 기호를 발할 수 있는 자인 것이다.”라고 했어. 기호의 해독방식은 ‘같은 것’의 반복을 강요하는 것으로는 배울 수 없어. 기호는 매번 새로운 것이고 다른 것이므로 ‘다른 것’, 즉 차이를 포함하면서 해독한다는 몸짓이 반복 가능하도록 되어야만 해. ‘나와 함께하시오’라고 말하는 교사는 학생을 하나의 사례 속에 끌어넣는 것을 통해 기호에 대한 응답을 실제로 해 보이는 거야. 그리하여 학생은 자신 나름의 ‘기호와의 만남의 공간’을 만들어내게 돼. 그리고 기호와의 만남은 새로운 질문을 생성하게 돼.

고레에다 히로카즈(Koreeda Hirokazu, 1962~)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 2013)>이미지 확대보기
고레에다 히로카즈(Koreeda Hirokazu, 1962~)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 2013)>
들뢰즈는 기존의 질문을 비판하는 것에 의해서만 사람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할 수 있다고 했어. “이 질문 설정 방식은 어디 이상한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러한 위화감이나 의문의 끝에 새로운 질문은 세워지고 새로운 개념이 창조돼. 습관 속에 사는 사람은 새로운 질문을 하지 않아. 료타도 반복되는 습관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새로운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지. 하지만 아이가 바뀌는 사건은 그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도록 강요하지. 그 질문은 아마 이런 걸 거야. ‘케이타의 아버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료타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아버지’ 개념을 변경하도록 요구하지. 즉 새로운 ‘아버지’의 개념을 창조하도록 만들고 아들과의 관계도 변화하게 만들어.

아이가 바뀐 것을 알게 된 후 료타는 두 아이를 모두 자신의 아들로 만들어야겠다는 엉뚱한 발상을 하지만 이 생각은 실패하게 돼. 자신에게 주어진 기호를 충분히 그가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배움도 일어나지 않은 거야. 여전히 그는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거야. 이 실패 후 료타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류세이와 케이타를 주말에만 바꾸어 생활하기로 해. 료타는 케이타에게 했던 방식과 똑같은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류세이를 교육시키려고 해. 젓가락질이 서툰 류세이에게 목욕하면서 욕조에 뜬 장난감을 젓가락으로 집는 연습을 하도록 시켜. 류세이는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원래 살던 집으로 도망치고 말아. 류세이를 집으로 다시 데려온 료타는 이제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류세이와 놀아주기 위해 총싸움놀이도 하고 베란다에 나가 낚시놀이도 해. 텐트를 사서 집에 설치하고 가족이 함께 누워서 밤하늘의 별자리를 알아보기도 해. 그때 밤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고 각자 소원을 빌어. 미도리가 류세이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보았을 때 원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다고 말해. 료타는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류세이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해. 실패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료타가 ‘알고 있는’ 좋은 아버지의 개념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기 때문일 거야. 진심으로 류세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실천한 셈이지.

기호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새로운 문제를 구성하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해.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원래 삶으로 되돌아가게 돼. 들뢰즈는 우리가 참과 거짓이 오로지 해답에만 관련되어 있으며 해답과 관련해서만 참과 거짓의 문제를 말할 수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해. 이런 편견은 사회적인데,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교 교육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거야. 문제를 내는 사람은 학교 선생이고 해답을 찾는 것은 학생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해답이 참인가 거짓인가에만 관심을 갖고 문제 자체의 참과 거짓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 들뢰즈는 이것을 일종의 노예 상태라고 말해. 들뢰즈는 “진정한 자유는 문제 자체를 결정하고 구성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생각했어. 중요한 것은 문제를 푸는 것보다는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발명에 해당하기 때문이야. 베르그송에 의하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참과 거짓으로 판정할 것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에 대해 참과 거짓을 판정해야 된다는 거야. 따라서 우리는 질문 그 자체가 틀린 ‘거짓 문제’를 경계해야만 해.

료타는 애초에 거짓 문제를 설정하고 그 주변에서 맴돌아. 베르그송은 거짓 문제의 종류를 분류하는데, 그것에 의하면 료타는 “회사가 중요한가 가족이 중요한가?”라는 ‘잘못 제기된 문제’를 설정한 거야. 그리고 그는 회사를 선택해.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회사’와 ‘가족’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들임에도 그는 그것을 같은 것으로 간주해. 회사의 경쟁적이고 위계적인 시스템을 가족에게 적용했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 된 해답을 찾지 못하고 계속 거짓 문제 주변을 맴돌게 되는 거야. 케이타에게 ‘승부욕’을 강조하며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그의 속내는 “요새 세상은 너무 착하면 손해니까.”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나고 있어.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그의 권력에 눌려 제대로 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해. 이런 상황은 “료타는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너희들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이 있을 거야.”라는 료타의 장모가 하는 말 속에 잘 드러나. 료타가 회사와 가족을 본질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혼동함으로써 그의 가족은 겉보기에는 단란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엄청난 불만과 불안이 잠재돼 있게 된 거야.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발견하는 것,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설정하는 거야.

그루도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유를 강제하는 기호와 만나는 경우가 있을 거야. 그때 그 기호를 해독하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면 사물/사건을 생각하기 시작할 거야. 그러나 설령 기호를 해독하는 것이 가능해도 거기서부터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할 수 없다면 료타처럼 계속해서 거짓 문제의 주위를 맴돌게 돼. 거짓 문제에는 답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힘의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돼. 그래서 거짓 문제를 통해 이득을 얻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결정권을 가진 자들이야. 료타의 가족도 권력을 가진 료타가 설정한 거짓 문제 주위를 계속 맴돌아. 그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고통 받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불만이 있어도 그의 결정을 따르는 거야. 권력을 가진 자들은 거짓 문제를 유포하고 사람들로부터 사고의 자유를 빼앗아 가. 따라서 거짓 문제를 피하는 기술을 배우고, 문제를 적절하게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이자 실천이야.

베르그송은 적절한 방식으로 문제가 제기되면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들뢰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 그는 ‘문제(probleme)’와 ‘질문(question)’을 구별하고 질문의 기원이 문제라고 생각했어. 문제는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우리는 그 해답을 찾아야 해. 질문이 올바른 해답을 발견했다고 해서 최초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료타에게 던져진 문제는 ‘자식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였다면 그에게 강요된 질문은 “케이타의 아버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을 거야. ‘케이타의 아버지’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았더라도 애초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거야. 료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문제에 직면했다면 그가 놓인 상황 속에서 문제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그만의 해답을 발견해야만 하는 거야. 이것은 ‘배움’의 문제와 결부되는데, 배운다는 것은 문제에 직면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에 대응해 나가는 것이야. 그에 비해 ‘앎’이란, 문제가 발하는 질문에 관해 이미 제시되어 있는 해결규칙을 손에 넣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앞에서 얘기했듯이 료타가 총싸움놀이나 낚시놀이를 하고 텐트 안에서 함께 자지만 류세이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미 제시되어 있는 규칙을 손쉽게 적용했기 때문일 거야. 료타가 아버지로서 케이타에게 사과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비로소 문제에 직면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거야. 그때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기존의 아버지 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아버지 개념을 창조할 것이고 그 개념에 따른 아버지의 역할을 실천할 것이므로 그는 기존의 삶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거야. 그렇기 때문에 기호와의 만남을 통해 시작되는 사유야말로 배움과 습득을 통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힘이야.

그루야, 어쩌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라는 것은 ‘앎’에 불과한지도 몰라. 물론 그 앎이 소용없는 것은 아니야. 그것들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지. 하지만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사유해서 그 해답을 찾아내는 길밖에 없을 거야. 그때 거짓 문제에서 벗어나 참된 문제에 도달하는 기술을 알고 있다면 료타처럼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도 사유를 시작해 배움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참된 문제를 설정하고 그 해답을 발견했다면 비로소 새로운 삶도 시작 되는 거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새로운 자유가 시작되는 거지.

그루야, 가을이 점점 깊어 간다. 교정의 느티나무도 새로운 색깔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어.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많이 차다. 감기 걸리지 않도록 건강관리 잘하고 수능에서 좋은 결과 얻기를 바랄게.

2015년 10월 22일
달빛로에서 터기쌤 이유종(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