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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제조업 위기와 해법] ③사상 최대 ‘재고’…제조업 경영환경 악화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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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제조업 위기와 해법] ③사상 최대 ‘재고’…제조업 경영환경 악화일로

3분기말 현재 129개 업체 재고자산 165조원. 이중 삼성전자 57조원
가격 낮춰도 안팔려, 신제품 가격 떨어지자 중고‧리퍼매장도 매출 뚝
공장 가동률 떨어지자 공장에서 사용하는 기게설비 판매도 급감, 위기

서울 시내 한 자동차 대리점 앞을 시민이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서울 시내 한 자동차 대리점 앞을 시민이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 사진=뉴시스
#국내 최대 가전업체인 삼성전자는 계묘년 새해 1월 1일부터 대규모 할인 판매 행사를 실시한다. ‘삼성전자 세일 페스타’는 2월 12일까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동시에 진행한다. 3회째를 맞이하는 이 행사는 연말연시 최대 소비 시즌에 맞춰 이뤄져 회사 매출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 왔으나 올해 상황은 녹록지 않다. 올 하반기 이후 불어닥친 불황에 처한 소비자들이 과연 지갑을 열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성전자는 이번 행사를 ‘전쟁’에 비유할 만큼 단단히 마음을 다지며 목표 실적을 달성하겠다는 각오다. 전체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삼성전자 세일 페스타’ 매출 실적이 2023년 대한민국 제조업, 나아가 경제를 가늠해볼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업들의 ‘재고’에 대한 긴장감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2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제조업체들이 2022년 발생한 대규모 재고 물량을 제때 소화하지 못해 영업적인 측면은 물론 회계상에서도 대규모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올 3반기까지 삼성전자의 재고자산은 57조3198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LG전자는 11조2071억원, SK하이닉스 14조6650억원, LG디스플레이 4조5170억원. 포스코는 17조4300억원으로 역시 최고 수준이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매출 상위 500대 기업 가운데 재고자산을 공시한 195개 기업을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3분기 말 기준 재고자산은 165조4432억원으로 지난해 말 121조6982억원보다 36.2% 증가했다.

올 4분기 실적이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매출이 늘지 않아 재고 규모는 더 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재고는 새해가 되면 ‘중고품’이 돼 가치가 떨어져 팔아봐야 남는 이익이 적거나 없어진다. 늘어난 재고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까지 더하면 사실상 적자다. 모든 기업이 연말 시즌까지 어떻게 해서든 재고를 줄이려고 가격도 낮추고 판촉 행사 기간을 늘리고 있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대기업 전자제품 대리점의 한 직원은 “출근 조회 때마다 간부들이 ‘오늘은 얼마만큼을 팔아야 한다’는 목표치를 제시하는데 평일은 거의 달성을 못 하고 있다. 주말에도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서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이 눈에 띄게 줄어드니 구경만 하려던 고객들도 빈 매장이 머쓱해서인지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 불안으로 신차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호황을 누리던 중고차 시장도 겨울 추위만큼 한파가 몰아쳤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1~11월 기간 전국 중고차 딜러들의 승용차 매입 대수는 96만227대였는데, 내수와 수출을 통해 판매한 건 84만7673대로, 11만2554대가 재고로 남은 상태다. 심지어 팰리세이드와 싼타페 같은 인기 SUV 중고차도 재고 품목에 이름이 올라 있다. 높아진 자동차 할부금융 금리가 발목을 잡았다. 중고차 판매업체 관계자는 “경기가 풀리지 않는다면 내년부터 1년 내내 특별판매 이벤트를 해야 할 지경”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재고 급증은 제조업체들이 사업장에서 신제품 생산을 주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생산을 줄이면서 벌어지는 파장은 크다. 당장 협력업체들은 원‧부자재 공급량이 줄어 단가를 올려야 하지만 그러지 못해 적자를 떠안아야 한다. 본사 사업장도 그렇지만 협력업체도 인원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갈수록 생산직‧기술직 직원 구하기가 어려운 가운데 일하고 있는 직원을 해고한다면, 경기가 회복됐을 때는 사람이 없어 생산을 못 하는 일이 벌어진다. 올해 반등한 조선업계가 그렇다.
팔아야 할 제품이 없고, 사려는 고객도 없는 유통업체도 동반 부실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 중견 전자업체가 매출 급감으로 수개월째 임금과 퇴직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등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업체는 주요 매출처였던 해외 판매도 경기 침체로 줄어들면서 사업장 가동률을 크게 낮췄다.

대기업 계열 기계설비 업체 관계자는 “우리는 완성품이나 부분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체에 기계 설비를 판매한다. 완성품 제조업체가 생산을 늘리는 만큼 우리도 판매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라며 “그런데 여름이 지나면서부터 제품 주문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일부 고객은 주문을 취소하고 있다. 사업장 가동을 줄이기 위함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만큼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경제단체들은 정부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다양한 제조산업 지원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고객들의 심리를 자극할 만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더 효과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정부가 기업의 세 부담 완화, 자금시장 안정화를 통해 민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면서 “경기침체 속 기업들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유동성 압박 완화와 불필요한 규제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