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한 송금 수수료 앞세워 신흥국 공략…1조 달러 예금 이탈 경고등
중국, 홍콩 내세워 '통제형 디지털 위안화'로 맞불…금융 헤게모니 격돌
중국, 홍콩 내세워 '통제형 디지털 위안화'로 맞불…금융 헤게모니 격돌

10년 전만 해도 스테이블코인은 고위험 자산인 비트코인과 법정화폐의 세계를 잇는 투기꾼들을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그 위상과 역할이 뿌리부터 바뀌며 미·중 지정학적 경쟁의 새로운 전선을 만들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을 전 세계로 실어 나를 '디지털 고속도로'로 떠오르면서, 시진핑 주석 또한 이 새로운 국면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의 바탕에는 전후 세계 질서의 근본적 재편이라는 흐름이 있다. 미국이 더는 세계에 안전 자산을 공급하는 전통적 역할을 꺼리면서 새로운 통화 전략을 찾고 있다는 분석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스티븐 미란 이사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 같은 기류를 분명히 했다. 그는 "무역 관점에서 볼 때, 달러 자산이 세계의 기축 통화로 기능하기 때문에 달러는 지속해서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과대평가는 미국 제조업 부문에 큰 부담을 주면서 경제의 금융화된 부문에 이익을 주었다"고 분석하며 기존 달러 체제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이 규제하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다. 미국은 2025년 이 법안을 통과시켜 스테이블코인 규제체계를 공식으로 세우고, 이를 국제적 영향력 확대의 도구로 삼고 있다. 이 디지털 달러는 의도적으로 이자 지급을 금지해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매력은 낮췄다. 대신 달러와 1대 1 교환을 보장해 국경을 넘나드는 '결제 수단'으로서 기능에 집중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쓰므로 즉각적인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평균 6.5%에 이르는 국제 송금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지면서, 특히 자본 통제가 심하거나 금융 시스템이 불안정한 국가의 개인과 소규모 기업 사용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수 있다.
신흥국 덮치는 '디지털 달러'…위안화 국제화 '빨간불'
이러한 흐름은 위안화 국제화를 국정 과제로 추진하는 중국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다. 중국 '일대일로' 구상의 핵심 협력국인 파키스탄의 사례는 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2021년 5월 이후 달러 대비 가치가 절반 가까이 떨어진 루피화를 경험한 파키스탄 국민에게 디지털 달러는 매력적인 대안일 수밖에 없다. 75년간 24차례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불안한 자국 통화 대신, 블록체인 지갑 속의 디지털 달러를 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이 현상은 비단 파키스탄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발도상국 전반으로 달러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퍼진다면, 기존 은행 시스템의 예금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해당 국가의 금융 시스템은 물론 중국의 금융 주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
세계적 금융기관인 스탠다드차타드는 이와 같은 '디지털 달러화' 때문에 앞으로 몇 년간 신흥 경제국 은행 시스템에서 약 1조 달러(약 1400조 원)의 예금이 스테이블코인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추산했다. 법정화폐의 가치 하락에 돈을 거는 이른바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debasement trade)'가 금과 암호화폐를 넘어 은행 시스템 자체를 위협한다.
역설적이게도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달러 패권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부활을 예고한다고 분석한다. 프랑스 중앙은행의 장피에르 랑도 전 부총재는 "디지털 달러는 기축 통화라는 전통 지위가 아닌, 디지털 네트워크 효과를 통해 힘을 얻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 세계 사용자가 늘수록 그 가치와 영향력이 커지는 플랫폼 효과 덕분에 달러의 지배력이 오히려 굳건해진다는 뜻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준비금으로 미 국채를 사야 하므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곧 미국 국채 수요 증가로 이어져 막대한 재정 적자를 메우는 데 직접 도움을 준다.
홍콩 시험대 삼은 중국, '통제형 주권'으로 맞선다
각국의 대응도 빨라지고 있다. 예금 이탈을 우려하는 유럽연합(EU)은 공식 디지털 유로를 통해 미국의 공세에 맞서려 하며, 개인의 보유 한도를 두는 등의 규제를 계획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스테이블코인과 암호화폐 거래를 엄격히 금지하고 중앙은행 디지털화폐(e-CNY) 개발에 힘써왔으나, 아직 국내 사용처는 제한적이다. 이에 중국은 홍콩을 새로운 전략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홍콩은 2025년 5월 스테이블코인 법안을 통과시켜 금융당국의 허가를 받은 기업만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도록 하는 규제 체계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국제 금융허브의 위상을 되찾는 동시에, 중국 본토의 금융 위험을 막으며 역외 위안화(CNH)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시장성을 시험하려는 다목적 전략이다. 알리바바, 징둥닷컴 등 중국의 거대 정보통신 기업들 또한 홍콩에서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궁극적으로 중국이 세운 목표는 미국의 탈중앙화, 익명성 바탕의 암호화폐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모든 거래에서 신원확인을 의무화하고 중앙에서 통제하는 '허가형 디지털 화폐' 체계를 만들고, 여기에 국가 통제 강화 기술을 더해 '프로그램이 가능한 주권'을 구현하는 것이 핵심 목표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중국의 자본 통제 기능을 약화시켜 정치 기반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반영한 결과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마크 저커버그의 실패한 꿈 '리브라'와는 차원이 다른 현실적인 위협으로 중국에 다가오고 있다. 전 세계의 개인과 기관이 달러라는 법정화폐 자체의 믿음을 잃더라도, 빵을 사기 위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써야 하는 세상이 올 수 있다. 트럼프는 그 꿈을 즐길지 모르지만, 시진핑에게는 악몽의 시작일 수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