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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해상 GPS 전쟁] 호르무즈 유조선 1000척 '위치 실종'…보이지 않는 전파 전쟁이 글로벌 물류 강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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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해상 GPS 전쟁] 호르무즈 유조선 1000척 '위치 실종'…보이지 않는 전파 전쟁이 글로벌 물류 강타

이스라엘·이란 전쟁 여파 GPS 교란 확산…방어용 재밍이 되레 에너지 대동맥 틀어막아
한국 수출기업·정유업계 '공급망 비상등’
2026년 3월의 페르시아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전선(戰線)과 싸우고 있다. 포탄도, 미사일도 아니다. 거대한 유조선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제 위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2026년 3월의 페르시아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전선(戰線)과 싸우고 있다. 포탄도, 미사일도 아니다. 거대한 유조선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제 위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
20263월의 페르시아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전선(戰線)과 싸우고 있다. 포탄도, 미사일도 아니다. 거대한 유조선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제 위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21세기 최첨단 디지털 항법 시스템이 한순간에 무력화되고, 선장들은 100년 전 항해사처럼 레이더와 눈에 보이는 지형지물에만 의존해 선박을 몰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원유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전파 장벽'에 막혔다. 단순한 항법 장애가 아니라, 세계 에너지 공급망의 급소가 흔들리는 사태다.

핵심 수치 요약.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핵심 수치 요약. 도표=글로벌이코노믹


절반이 사라졌다…페르시아만 선박 1000GPS '먹통'


싱가포르 스트레이츠 타임스(Straits Times)8(현지시각)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이 중동 전역으로 파급되면서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운항 중인 선박 1000여 척이 위성항법장치(GPS) 신호를 잃거나 위치조작 공격을 받고 있다. 이는 해당 해역을 오가는 전체 선박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다. 대형 유조선(VLCC) 한 척은 약 200만 배럴의 원유를 운송한다.

에너지 시장 분석 전문기관 케플러(Kpler)의 디미트리스 암파트지디스 수석 분석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이 본격화된 이후 신호 교란이 사실상 상시화됐다""현재 아랍에미리트(UAE)와 오만 인근 해상을 항행하는 선박 대다수가 실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밍''스푸핑'…스마트폰보다 취약한 유조선 GPS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구조적 원인으로 선박 GPS 시스템의 고질적 취약성을 지목한다. 토드 험프리스 텍사스대 공학 교수는 "일반 스마트폰은 미국의 GPS, 유럽의 갈릴레오(Galileo), 러시아의 글로나스(GLONASS), 중국의 베이두(BeiDou) 4개 위성 시스템의 신호를 동시에 수신하지만, 상당수 상선은 1990년대 초반 수준의 민간용 L1 C/A 단일 신호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특정 주파수를 강력한 잡음으로 덮어버리는 '재밍(Jamming)'에 속수무책이다. 더 심각한 위협은 가짜 위치 신호를 주입하는 '스푸핑(Spoofing)'이다. 자동식별시스템(AIS)이 교란되면, 공해상을 항행하는 선박이 이란이나 UAE 내륙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데이터가 조작된다. 위성항법 전문 저술가 캐서린 던은 "GPS는 위치만 알려주는 장치가 아니다. 선박의 시계, 레이더, 속도 기록계 등 전자 장비 전체를 제어하는 핵심 인프라"라며 "신호가 왜곡되면 대형 선박의 정상적인 조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경고했다.

'자국 보호'가 부른 역설…방어용 교란이 물류를 삼키다


이 사태를 만든 주체는 역설적으로 각국의 '자국 방어' 시스템이다. 이스라엘과 이란, 주변 걸프 국가들은 이란제 샤헤드(Shahed) 드론과 위성 유도 미사일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해안선 전역에 강력한 신호 교란 장치를 가동 중이다.

험프리스 교수는 "2024년 내내 이스라엘이 자국 배달 앱과 항공 운항이 마비되는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방어용 재밍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걸프 국가들도 물류 손실을 감수하며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항공업계의 충격은 더 크다. 국제 항공 안전 규정에 묶인 민항기들은 15년 전 기준의 구식 GPS 수신기만 사용할 수 있어 교란 작전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다. 익명을 요청한 한 상선 선장은 "선박이 워낙 거대해진 탓에 전자 장비 없이는 조타 자체가 불가능하다""지금은 레이더와 육안으로 보이는 지형지물에 의지해 겨우 항행하는, 20세기 방식으로 후퇴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한국 정유·해운에도 불똥…에너지 안보 '비상등'


이번 사태는 중동 해역에 그치지 않고 한국 경제에도 직접적인 파장을 미친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 4사는 원유 도입량의 6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호르무즈 해협 통과 물량이 지연되거나 차단될 경우 정제 원가 상승은 불가피하다. 국내 해운업계 관계자는 "GPS 교란으로 항해 시간이 평소 대비 30% 이상 늘어났다는 게 현장의 공통된 보고"라며 "더 큰 문제는 사고 위험이 커지면서 선박 보험료가 평시 대비 5배 이상 치솟고 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의 실질적 봉쇄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110달러(164500)를 상회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해상 물류 비용 급등은 글로벌 공급망 전반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전파할 수 있어,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전환 시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GPS 이후'를 준비하라…대안 항법 기술 개발 경쟁


이번 사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의 부산물이 아니라, 현대 물류 인프라가 위성항법 단일 체계에 얼마나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시장에서는 지구 자기장을 활용한 항법이나 관성항법장치(INS) 'GPS 의존에서 벗어난' 대안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현장 전문가들은 이 기술이 상용화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문제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외교다. 전파는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방어를 위해 쏜 전파 장벽이 우방의 선박까지 눈멀게 만드는 역설은, 중동의 교전 당사국들이 교전 규칙을 합의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다. 2026년 봄, 세계 원유의 5분의 1이 지나는 해협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전쟁'의 청구서는 결국 전 세계 소비자들이 나눠 내게 될 것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