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1. 태초의 어둠 속에 켜진 불빛
그리기란 무엇입니까?
아득한 옛날, 지구라는 행성에 처음으로 '그림'이 태어났던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칠흑 같은 동굴의 어둠 속, 떨리는 횃불 아래 누군가 벽에 손을 댔습니다. 그가 그린 것은 단순한 들소 한 마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고, 간절함이었으며, 끝내 붙잡고 싶었던 생의 한 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그리는 자'와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들이 엮어온 긴 그리움의 기록인지도 모릅니다. 중세를 지나 인상파에 이르러서야 미술은 그리기의 본질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제례 의식을 위한 도구가 아닌, 인류와 개인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문화적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을 부르기 위해, 권력의 화려함을 남기기 위해 붓을 들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늘 캔버스 앞에 홀로 앉아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던 고독한 영혼들이 있었습니다.
2. 오직 인간만이 멈춰 서서 바라본다
지상의 수많은 생명 중에 오직 인간만이 그림 앞에 멈춰 섭니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늙은 개도 후각과 시각, 청각과 미각을 가지고 있어서 느끼고 즐길 줄 압니다. 노을의 냄새를 맡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붉게 타오르는 저녁 하늘을 보며 눈물 흘리지는 않습니다. 다른 생명들에게 감각은 본능과 직결되어 있지, 정신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감각은 영혼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음악이 흐를 때 식물이 춤추고 동물이 편안히 잠든다는 이야기는 아름답습니다. 모든 동식물이 음악에 반응하며, 맛있는 음식과 좋은 냄새로 편안해지는 것은 유기질로 이루어진 모든 생명체가 가진 본능일 것입니다. 그러나 멈춰진 화폭 앞에서, 그 침묵의 색채 앞에서 가슴이 요동치는 존재는 우주에서 오직 우리뿐입니다. 손으로 그려진 행위에 반응하는 것은 지적 수준과 정비례하지 않는 또 다른 영역입니다.
3.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거룩한 불편함
맛있는 음식은 배를 채우고, 부드러운 자장가는 몸을 이완시켜 잠들게 합니다. 그것은 안락함입니다.
모든 감각적 행위가 인간의 부교감신경에 영향을 미칠 때, 그림은 유일하게 교감신경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의 의도로 조절되지 않는 신성의 본능에 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술관을 찾고 붓을 드는 이유는 편안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신성, 그 야생의 본능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우리를 깨웁니다. 당신은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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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4. 차가운 시대를 건너는 따뜻한 구원
지금 우리는 차가운 숫자와 현란한 불빛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매끄러운 기계와 디지털 화면으로 대체되는 세상에서, 그림은 모든 기능을 컴퓨터와 그래픽에 빼앗긴 것처럼 보입니다.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이 본질적 개념의 한정성을 지적하며 포괄적 수용의 필요성을 말했지만, 인류는 새로운 철학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열린 시각으로서 다양성의 채용은 극단적으로 보이는 실험미술까지 나오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미술 행위는 개인의 취미생활을 통한 구원이나 공동의 제의, 취향을 위한 직업적 행동의 결과물로서 의무를 다했습니까?
이때 그림은 가장 따뜻한 구원이 됩니다. 붓 끝으로 전해지는 물감의 질감, 종이의 거친 표면, 내 손으로 그어 내린 삐뚤빼뚤한 선. 이 아날로그의 행위야말로 차가운 기계 문명 속에서 내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의식입니다.
색과 선에 의한 인간의 신경망 자극, 시각 만족을 통한 정신적 위안, 상업적 기능을 통한 소유 본능의 만족. 이것만으로 미술이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미술의 그리기는 특정한 다중에 대한 존재감의 표현일 수도 있으나, 어떤 개인에게는 어려운 문제의 해결과 구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림은 말합니다. 당신은 부속품이 아니라고, 당신은 느끼고 아파하고 감동하는 존재라고. 화가의 그림이 누군가에게 닿아 위로가 되듯, 내가 그린 서툰 그림 한 장이 나를 구원하고 나의 가족을 위로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 사회 성원으로서 목적한 바를 이루듯이, 한 사람의 그림이 그리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감응을 통한 구원의 문제와 직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붓을 드십시오, 당신은 인간이기에
그러니 부디, 붓을 드십시오.
거창한 화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유명 평론가의 찬사나 비싼 낙찰가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리기는 본질로 들어가서 개인의 해소를 이루어야 하고, 그리는 자의 해소의 결과물에 반응한 보는 자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다중의 찬사를 받기 위한 외형적 조형 논리를 벗어나 개인 속으로 내밀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감상자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그저 당신의 고단한 하루를,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색으로 칠하고 선으로 그어보십시오. 그 행위 속에서 당신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채워줄 수 없는 인간의 빈 가슴을 채우는 것, 그것은 오직 그리기라는 본능뿐입니다. 지구상 신성의 특권을 지닌 자들이 과학의 발달로 변해가는 신인류의 다름을 따라가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따뜻한 정서를 보완해줄 수 있는 유일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화가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일상에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바라보며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릴 수 있기에 인간이고, 그림으로써 비로소 신에게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존재들입니다.
이미지 확대보기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