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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첫 쇳물 53년…‘산업의 쌀’ K철강, 자립 넘어 생존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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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첫 쇳물 53년…‘산업의 쌀’ K철강, 자립 넘어 생존을 묻다

배 띄우고 車 만들던 철, 이젠 값싼 수입재와 싸운다
광양 전기로·포항 하이렉스…포스코의 다음 쇳물
첫 쇳물 53년, 철강은 다시 국가 산업의 문제다
포스코 포항제철소 1고로. 1973년 6월9일 첫 쇳물을 생산한 포항 1고로는 한국 철강산업 자립의 상징으로 꼽힌다. 사진=포스코이미지 확대보기
포스코 포항제철소 1고로. 1973년 6월9일 첫 쇳물을 생산한 포항 1고로는 한국 철강산업 자립의 상징으로 꼽힌다. 사진=포스코
1973년 6월9일 포항제철소 제1고로에서 흘러나온 첫 쇳물은 한국 제조업 자립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철강 수입에 의존하던 한국이 ‘산업의 쌀’을 스스로 생산하기 시작한 순간으로, 이후 조선·자동차·전자·건설 산업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대일 청구권 자금과 일본 철강업계 협력으로 일궈낸 포항제철소는 반세기 만에 한국을 세계 6위 철강 생산국으로 끌어올렸다. 한국철강협회가 매년 6월9일을 ‘철의 날’로 기념하는 이유다.

다만 올해 철의 날을 맞는 철강업계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첫 쇳물이 제조업 자립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의 쇳물은 생존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중국발 저가 공세와 내수 침체, 미국·유럽의 보호무역, 탄소 규제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한국 철강산업은 ‘얼마나 많이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떤 철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 것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中 저가재에 내수 흔들…‘산업의 쌀’도 방어전


9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국내 철강사들은 수요 부진과 수입재 공세가 겹치며 수익성 방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건설경기 침체로 철근·형강 등 봉형강류 수요가 줄었고, 제조업 회복 지연으로 자동차강판·후판 등 판재류 시장도 뚜렷한 반등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철강 내수의 심리적 저지선으로 여겨졌던 5000만t 선이 흔들리면서 업계에서는 단순한 경기 하강을 넘어 산업 기반 약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가장 직접적인 압박은 중국산 저가 철강재다. 중국 내 부동산 침체와 공급과잉이 장기화되면서 중국 철강사들은 남는 물량을 해외로 밀어내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산 제품 유입이 늘면 국내 철강사는 원가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하기 어려워진다. 수요가 약한 상황에서 수입재가 가격 하단을 눌러버리면 국내 생산 기반은 더 빠르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보호무역도 변수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철강을 전략 산업으로 보고 수입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EU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통해 철강 제품의 탄소 배출량을 비용으로 환산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가격과 품질이 수출 경쟁력을 갈랐다면, 앞으로는 생산 과정에서 얼마나 탄소를 줄였는지가 시장 접근성까지 좌우하게 된다.

버티는 구조조정, 바꾸는 저탄소 전환


국내 철강업계의 대응은 두 갈래다. 당장은 수입재 방어와 설비 효율화로 버티고, 중장기적으로는 저탄소·고부가 철강으로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에 따라 업계는 범용재 중심의 과잉 설비를 조정하고 고부가 제품 비중을 높이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산 후판과 일·중산 열연강판을 둘러싼 반덤핑 조치도 저가 수입재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막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은 철강 본원 경쟁력 재건과 저탄소 전환을 앞세워 광양 전기로와 포항 하이렉스(HyREX) 데모 플랜트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소에 약 6000억원을 투입해 연산 250만t 규모의 전기로를 올해 가동할 계획이다. 전기로는 고로보다 탄소 배출량이 적어 수소환원제철로 가는 중간 단계의 핵심 설비로 꼽힌다. 철스크랩을 활용하는 전기로 기반을 넓히면서 탄소 배출을 줄이고, 향후 저탄소 철강 수요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포항제철소에서는 독자 수소환원제철 기술인 하이렉스 실증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수소환원제철은 철광석을 환원할 때 석탄 대신 수소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상용화에 성공하면 제철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포스코는 2030년 상용 기술 확보를 거쳐 2050년까지 기존 고로를 수소환원제철 체제로 전환한다는 구상이다.

현대제철도 전기로 기반 저탄소 생산체제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전기로 비중을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적용하는 로드맵을 세웠다. 전기로 조업 경험을 보유한 현대제철은 자동차강판 등 고급재 영역에서 저탄소 생산기술을 확보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자립의 쇳물, 이제는 생존의 해법으로


문제는 비용이다. 전기로와 수소환원제철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한다. 설비 투자비, 청정수소 공급망, 산업용 전기요금 체계가 함께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업 단독으로 전환 속도를 끌어올리기 어렵다. 업계가 이른바 ‘K-스틸법’ 제정을 요구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세제 지원, 연구개발 지원, 전력요금 부담 완화 없이는 글로벌 저탄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

철강산업은 여전히 한국 제조업의 기초 체력이다. 조선용 후판, 자동차강판, 건설용 철근, 전기강판, 에너지용 강재는 주요 산업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철강 공급망이 흔들리면 조선·자동차·방산·건설 등 전략 산업 전반의 소재 안정성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철강을 단순한 소재 산업이 아니라 국가 제조업의 기반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1973년 포항의 첫 쇳물은 한국이 철강 수입 의존에서 벗어나 제조업 국가로 가는 문을 열었다. 53년 뒤 한국 철강산업은 다시 질문 앞에 섰다. 많이 만드는 철강의 시대를 넘어, 탄소를 줄이고 수익성을 지키며 공급망을 방어하는 철강의 시대로 갈 수 있느냐다. 자립의 상징이던 쇳물은 이제 생존의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다현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dh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