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김대호 인물] AMD 리사수(蘇姿丰) "한국에 온 진짜 이유"

글로벌이코노믹

[김대호 인물] AMD 리사수(蘇姿丰) "한국에 온 진짜 이유"

리사수 AMD CEO /사진=AMD  이미지 확대보기
리사수 AMD CEO /사진=AMD
[김대호의 인물 오디세이] 반도체 영웅 리사 수의 방한과 파산 제국 회생의 신화

세계 반도체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반도체 영웅’으로 불리는 리사 수(Lisa Su, 蘇姿丰) AMD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한국 땅을 밟았다. 이번 방한의 대외적 공식 목적은 AMD가 직접 주관하는 소비자 행사 ‘AMD 게이머 데이’ 참석이다. 서울 용산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국내 PC 유저 및 게이머들과 직접 소통하는 자리다. 그러나 이는 대외적으로 내세운 형식적 명분에 불과하다.

리사 수가 태평양을 건너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대한민국과의 ‘반도체 혈맹’ 구축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 혁명의 한복판에서 글로벌 AI 가속기 시장은 엔비디아의 독주 체제로 굳어지고 있다. 이에 맞서 차세대 가속기 시장의 지각변동을 노리는 AMD에게 한국은 대체 불가능한 전략적 요충지다. AI 가속기의 두뇌 역할을 완벽하게 보좌할 고대역폭 메모리(HBM)의 절대강자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그리고 첨단 파운드리와 차세대 NPU 생태계를 품은 한국 기업들과의 공조 없이는 ‘AI 천하삼분지계’를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게이밍 축제의 이면에는 글로벌 AI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치밀한 물밑 합종연횡이 숨쉬고 있다.

파산 직전 2달러짜리 ‘동전주’로 전락했던 AMD를 시가총액 수백조 원의 초일류 반도체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이 작은 체구의 여성 엔지니어는 과연 누구인가. 리사 수는 1969년 11월 대만 남부의 유서 깊은 문화 도시 타이난(台南)에서 태어났다. 그가 만 세 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의 유년기는 학문적 탐구와 경제적 감각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환경 속에서 무르익었다. 부친인 수춘천(Su Chun-chen)은 통계학자이자 학자로 활동하며 어린 딸에게 논리적 사고와 수학적 추론의 즐거움을 체득하게 했다. 모친 뤄춘슈(Sandy Luo)는 회계사이자 기업가로 활약하며 리사 수에게 시장의 흐름과 냉철한 사업 감각을 심어주었다. 리사 수는 훗날 자신의 성장기를 돌아보며 부친으로부터 수학적 엄밀함을, 모친으로부터 과감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물려받았다고 회고했다.

어릴 적부터 인형 대신 기계 장난감과 라디오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데 몰두했던 그는 뉴욕의 명문 특수목적고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Bronx High School of Science)를 거쳐 1986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반도체 분야는 여성이 극히 드문 거친 공학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리사 수는 학부 1학년 시절 반도체 웨이퍼 제조 실험을 처음 접한 순간 운명적인 매료를 느꼈다. 실리콘 결정 위에서 전자가 움직이는 원리에 깊이 빠져든 그는 MIT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연이어 취득하며 차세대 반도체 소자 연구에 청춘을 바쳤다.

엔지니어로서의 두각, 기술의 최전선에서 증명한 역량


MIT를 졸업한 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를 거쳐 1995년 IBM 기초연구소에 합류한 리사 수는 반도체 기술사에 남을 중대한 기술적 돌파구를 열었다. 당시 반도체 미세화의 최대 난제는 알루미늄 배선의 저항 한계였다. 리사 수는 전도율이 월등히 뛰어나지만 공정이 까다로워 상용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구리(Copper) 배선 기술’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그가 이끈 연구팀은 알루미늄 배선을 구리로 대체하는 양산 기술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고, 이는 반도체 동작 속도를 20% 이상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학술적 이론에 머물지 않고 현장 제조 수율을 완벽히 장악하는 그의 실전적 엔지니어링 역량은 이때 이미 업계 전반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IBM에서 소니(Sony), 도시바(Toshiba)와 합작 개발한 ‘셀 광대역 엔진(Cell Broadband Engine)’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이 칩은 소니의 대표작 플레이스테이션 3(PlayStation 3)의 메인 두뇌로 채택되며 콘솔 게이밍 시장을 뒤흔들었다. 연구실의 공학자가 기술과 사업을 통합 조망하는 비즈니스 리더로 도약하는 계기였다.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Freescale Semiconductor)의 최고기술책임자(CTO)와 수석 부사장을 역임하며 조직 경영 능력을 검증받은 그는 2012년,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며 침몰해가던 AMD의 글로벌 사업 부문 수석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난파선 AMD에 오르다: 침몰 직전의 제국


2014년 10월, 리사 수가 AMD의 첫 여성 CEO로 공식 취임했을 당시 회사의 내부 사정은 절망적이었다. 인텔의 거대한 아성 앞에서 PC CPU 시장 점유율은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쳤고, 그래픽 부문에서는 엔비디아의 벽을 넘지 못했다. 회사의 주가는 2달러 밑으로 떨어져 ‘동전주(Penny Stock)’ 신세로 전락했으며, 누적 부채는 20억 달러를 넘어 월가에서는 AMD의 법정관리와 파산 청산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내 사기는 바닥을 쳤고, 생존을 위해 스마트폰 칩셋, 저전력 서버 등 유행을 좇아 문어발식으로 벌려놓은 사업들은 만성 적자만 키우고 있었다. 취임 첫날, 리사 수는 경영진과 연구원들을 소집해 단호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고성능 컴퓨팅(High Performance Computing)에 회사의 모든 운명을 걸겠습니다.” 리사 수의 처방은 냉철했다. 스마트폰 칩셋 진출 등 비핵심 사업을 즉시 매각·정리하고, 가용 가능한 연구개발(R&D) 예산을 오직 하나의 프로젝트로 집중시켰다. 훗날 AMD를 구원한 차세대 마이크로아키텍처, ‘젠(Zen)’ 프로젝트였다. 그는 적자 속에서도 R&D 비용만은 줄이지 않았으며, 엔지니어들이 단기 실적 압박에 휘둘리지 않고 칩 설계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경영의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라이젠(Zen)'의 기적과 반도체 패권의 재편


5년에 걸친 사투 끝에 2017년 봄, AMD는 마침내 ‘라이젠(Ryzen)’ 프로세서를 세상에 공개했다. 결과는 시장의 판도를 단숨에 뒤흔든 대역전극이었다. 경쟁사 인텔의 플래그십 제품 대비 절반에 가까운 가격에 대등하거나 이를 능가하는 멀티코어 성능을 뿜어낸 것이다.리사 수의 승부수는 칩렛(Chiplet) 구조 도입과 과감한 파운드리 동맹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거대한 단일 칩을 제조하는 대신, 기능별 다이를 작게 쪼개 정밀하게 결합하는 칩렛 공법을 통해 제조 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생산 수율을 극대화했다. 또한 자체 팹(생산 공장) 유지를 고집하지 않고 대만 TSMC와 끈끈한 밀월 관계를 맺어 미세 공정 경쟁에서 인텔을 앞지르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어냈다.

라이젠의 성공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리사 수는 서버용 CPU 시장으로 전선을 넓혀 ‘에픽(EPYC)’ 시리즈를 연이어 흥행시켰다. 1% 미만으로 추락했던 AMD의 데이터센터 서버 CPU 시장 점유율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등 글로벌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선택을 받으며 20%를 돌파했다.

파산 직전 2달러 선을 맴돌던 주가는 가파르게 치솟아 수백 배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고, 2022년에는 자일링스(Xilinx)를 약 500억 달러에 인수합병하며 FPGA와 특수목적 컴퓨팅 영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시가총액 면에서 수십 년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겨졌던 인텔을 추월하는 역사적 쾌거를 달성한 순간이었다.

5% 룰의 리더십: 완벽주의가 아닌 점진적 축적


리사 수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로 꼽히는 비결은 그의 독특한 리더십 철학에 있다. 그가 강조하는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이른바 ‘5%의 법칙(5% Rule)’이다.위기에 빠진 기업들은 흔히 단번에 50%, 100%의 파괴적 혁신을 이뤄내겠다고 장담하지만, 이는 대개 조직의 과부하와 실패로 끝난다. 리사 수는 개발진에게 “어제보다 딱 5% 더 나은 제품, 경쟁사보다 5% 더 효율적인 아키텍처를 만들어내라”고 주문한다. 매 개발 주기마다 달성 가능한 5%의 개선이 축적될 때, 복리의 원리처럼 경쟁자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기술적 해자가 완성된다는 철학이다.

엔지니어 출신 CEO답게 그는 복잡한 기술 난제를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면서도, 현장의 엔지니어들을 존중하는 소통을 멈추지 않았다. 탁상공론식 재무제표 대신 칩 다이어그램과 트랜지스터 밀도를 직접 들여다보며 개발진과 치열하게 토론하는 그의 현장 리더십은 AMD 특유의 끈끈하고 도전적인 사내 문화를 부활시킨 원동력이었다.

한국과의 동맹, AI 대전의 분수령


현재 리사 수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거대한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생성형 AI 혁명과 함께 데이터센터의 패권이 범용 CPU에서 고성능 가속기(GPU/NPU)로 급격히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쿠다(CUDA)’ 생태계의 철옹성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한 구도 속에서, 리사 수는 다시 한번 도전자로서 활로를 뚫어야 한다.

AMD는 차세대 AI 가속기 ‘인스팅트(Instinct) MI’ 라인업을 앞세우고 오픈소스 연합 ‘ROCm’ 생태계를 적극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도전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은 바로 한국에 있다. 엔비디아 가속기의 핵심 혈맥을 쥐고 있는 국내 메모리 반도체 생태계의 역량을 AMD의 플랫폼과 얼마나 신속하고 유기적으로 결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게이머 데이’라는 대중적 축제를 명분 삼아 한국을 찾은 리사 수의 발걸음이 단순한 마케팅 행보를 넘어 글로벌 반도체 지형을 뒤흔들 전략적 함의를 갖는 이유다. 기술의 본질을 잃지 않는 우직함, 명확한 우선순위 설정, 그리고 매일 5%씩 축적해 온 집념. 한국과의 반도체 동맹을 지렛대 삼아 새로운 AI 제국의 전선으로 나아가는 리사 수의 다음 승부수에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