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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공창' 만든 후 향락업소 매개 '겸업매춘'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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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공창' 만든 후 향락업소 매개 '겸업매춘' 늘어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매춘사(賣春史)

음주가무에 잠자리 곁들인 고급업소는 상류층들만 사용

한국전쟁 이후 미군기지 주변 '기지촌' 매춘행위 성행

청량리588이나 미아리텍사스촌이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집창촌이 존재하고 있다.이미지 확대보기
청량리588이나 미아리텍사스촌이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집창촌이 존재하고 있다.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일명 ‘청량리 588’이나 ‘미아리 텍사스’ 같은 사창가들은 여전히 영업 중이라네요. 그러다 보니 정부가 법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글쎄요. 성매매단속법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단언컨대 이 세상에 남자와 여자가 있는 이상 ‘매춘’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매춘은 시대적으로 합법인지 혹은 불법이었는지에 따라 드러나거나 은밀히 감춰졌을 뿐 이었지 존재 그 자체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포르노’라는 용어는 일찍이 고대 로마에서 ‘사창가’를 지칭하는 ‘포네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실 포네기의 순수한 뜻은 ‘아치 문’인데, 이 아치문을 통해 들어가면 사창가가 있다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포네기’가 상당히 많아서 매춘부 수만해도 8만 명(로마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렀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매춘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문헌상 고구려 시대부터 기록이 전해지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양반을 중심으로 이른바 기생(관기)과의 매춘이 성행했고, 일반 서민들은 주막이나 역참에 화대를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비록 매춘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유교를 지향하는 풍토에서 매춘을 드러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매춘이 합법적으로 드러난 때는 1883년 인천개항 이후입니다. 개항이 되자 많은 외국인이 인천으로 몰렸으며, 특히 일본인들은 1894년 청일전쟁 직전 이미 4000명 이상이 인천에 거주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일본 조로(일본 창녀)들이 인천에 들어와 매춘 행위를 했습니다. 일본은 16세기부터 공창(公娼)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네들 입장에서는 매춘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당시 조선 사람들의 눈에는 추접스럽고 낯부끄러워 원성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에서의 세력을 확고히 다진 일본은 조선 정부에 일본 거류지 내에서의 공창을 요구했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총독부에서 규칙까지 제정하며 공식적으로 공창 제도를 정착시킵니다.

공창 지역은 주로 외국인 내왕이 잦은 항구도시였습니다. 일본 기생들은 ‘유곽(遊廓)’이라는 일정한 공창지역에서만 매춘업을 했는데, 이는 조선인과의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게 하려던 일본 정부의 입김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의 유곽을 본뜬 조선식 유곽도 전국 도처에 자리를 잡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궁궐이나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한일합방과 더불어 그 역할을 잃게 되자 자연스럽게 공창의 매춘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식이든 조선식이든 유곽은 말 그대로 ‘음주가무’를 곁들인 매춘 업소였습니다. 다시 말해 유곽에서는 고급요리와 좋은 술 그리고 요정(기생)들의 춤사위가 노랫가락과 어울렸고 요정과의 잠자리도 제공받는 그야말로 상류층들의 매춘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일반 서민들은 유곽이나 요정은 출입하기가 힘들었고 그 대신 값싼 사창(私娼)가로 몰렸습니다.

사창은 공창이 아니었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를 받을 수 있었지만 당시 일제는 사창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사창은 공창과 달리 음주가무의 유희가 없고 그저 남자들의 성적욕구만 푸는 곳이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일제시대에 존재하던 공창제도를 폐지시킵니다. 당시 언론은 여성의 존엄성과 문화국가의 체면을 위해 진작했어야 할 일을 늦게나마 미군이 대신해 주었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런 찬사의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미군부대 주변으로 매춘업소가 몰립니다. 이른바 ‘양공주집’ 혹은 ‘기지촌’이라 부르던 이 매춘업소는 주 고객을 미군으로 바꾸었을 뿐이고 매춘 행위는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미군기지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아울러 기지촌도 그만큼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기지촌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건이 계속 터지면서 급기야 1961년 정부는 매춘을 사회악으로 규정하여 ‘윤락행위 방지법’을 제정합니다. 그러나 이 법 역시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우선은 나라가 너무 가난하여 윤락여성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할 수 없었고, 비록 작은 규모라 하더라도 매춘을 통해 외화획득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정쩡한 상태로 매춘업은 지속됩니다.

마도로스라고 하는 외국 무역선 사람들을 주 고객으로 한 인천의 ‘엘로우 하우스’.이미지 확대보기
마도로스라고 하는 외국 무역선 사람들을 주 고객으로 한 인천의 ‘엘로우 하우스’.
1963년 외국인 전용호텔인 워커힐이 서울에 들어섭니다. 이 호텔은 미군 장성 워커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이라 했는데, 내국인은 들어갈 수 없고 미군 및 유엔군들만 휴양 겸 이용하라는 취지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속내는 외국인들로 하여금 카지노나 캉캉 쇼 등을 즐기게 하여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그런데 워커힐이 문을 열자 이곳을 이용하는 외국인들이 자연스럽게 여자를 찾았고, 이때부터 ‘기생관광’이란 새로운 용어가 탄생합니다. 그리고 외화획득의 수단으로서 ‘기생관광’은 정권에 의해 암묵적으로 용인되거나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기지촌과 호텔을 중심으로 하는 기생관광이 날로 성행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집창촌이 부산, 인천 등 항구에 뿌리내립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인천의 ‘엘로우 하우스’가 그것인데, 주 고객들은 마도로스라고 하는 외국 무역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인천에 정박하여 길면 한 달 이상 체류해야 했는데 이들을 상대로 한 집창촌이 바로 ‘엘로우 하우스’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자신들의 배에서 체류하지만 시내관광이나 유흥을 위해 육지에 발을 내디디면 이들만의 전용 술집인 시멘스 클럽(sea-man's club)이 그들을 맞이했고, 그곳의 접대 여성과 눈이 맞으면 ‘엘로우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시멘스 클럽에 들르지 않더라도 곧장 ‘엘로우 하우스’에 가면 생전 모르는 여성과 하루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198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의 매춘은 그 형태와 공간이 크게 달라집니다. 과거에는 너무 가난해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무작정 상경한 여성들이 미군 기지촌이나 특정 집창촌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성을 팔았던 ‘전통생계형 매춘’이었지만, 차츰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여전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 중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거나 혹은 더욱 쉽게 돈을 벌기 위해 향락업소를 매개로 호스티스나 콜걸, 안마사, 티켓 커피 배달 등으로 변신하며 성을 파는 ‘산업 형 매춘’이나 ‘겸업매춘’ 현상이 크게 증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또다시 우리 사회는 ‘성매매 특별 단속법’으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퇴폐 향락의 주범인 매춘을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아동성범죄 방지와 건전한 성문화 정착을 위해 매춘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는 이상 매춘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