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아니,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막 부화하는 새떼가
일제히 햇살 속으로 날아오르고 흔들리는 가지마다
그들의 빈 몸이 내걸려 눈이 부시네.(「목련」 전문)
고강(古矼) 김준환 시인께서 이 소품을 읽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 때 나는 막 퇴계로 5가 횡단보도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의 일방적인 말인 즉 ‘당신은 이제 시를 그만 쓰라’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당황하여 다짜고짜 그리 말하는 그의 저의(底意)를 정중히 물었다. 그랬더니 ‘자신이 지금껏 수많은 시를 읽어왔고 써 왔지만 이처럼 완벽하고 높은 경지에 있는 작품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해명조차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갑자기 겸연쩍어진 내가 되레 껄껄 웃으면서 ‘필요 이상의 과찬(過讚)’이라고 응수하자 그가 덧붙이기를, ‘이 작품은 수학적으로 보나 철학적으로 보나 완벽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과찬의 진의(眞意)를 더 이상 캐묻지도 못했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전체 4연 8행으로 된 짧은 시이다. ‘아니,/왜 이리 소란스러운가?’라는 문장(제1연)은 화자(話者: 작품 속에서 말하는 주체로서 시인에 의해서 창조되는 시인의 분신 같은 존재임)가 방안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화자는 이처럼 바깥이 시끄럽다고 여기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이 궁금하여 자연스럽게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본다(제2연).
그 결과, 막 부화(孵化)한 새떼가 일제히 햇살 속으로 날아올랐다(제 3연)는 ‘주관적 판단으로서 진실’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 주관적 진실이 모든 사람의 눈에 똑 같이 보이는 현상으로서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화자의 눈에 비추어진 개인적인 현상으로서 주관적인 진실일 뿐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착시(錯視)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유세계로서 마음의 눈에 비추어진 개인의 상상 속 정황으로서 이미지일 뿐이다.
어쨌든, 방안에서 화자가 들었을 때에 소란스러운 바깥의 정황과 그 이유를 나름대로 해명한 셈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비현실적이어서 다소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곧, 막 알에서 깨어난 새끼 새라면 아직 깃털이 나지 않아서 날 수도 없었을 텐데 화자의 눈에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화하여 깃털이 나고 날 수 있을 때까지의 꽤 긴 시간이 화자의 사유세계 속에서는 다 단축되어 버렸거나 무시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비약(飛躍)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이런 비약은 장황한 설명을 줄이거나 불필요한 그것을 피하기 위한 표현상의 한 기교로서 수단이자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새떼가 일제히 날아올랐으니 그들이 앉아있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고, 새떼는 이미 햇살 속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그들의 빈 몸만이 나뭇가지에 걸려 눈이 부시다(제4연)는 것이다. 여기서 눈부신 빈 몸의 원관념이야 시제가 암시하는 목련꽃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듯이 그 빈 몸이야 알껍데기이거나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 같은 허상(虛像)임에는 틀림없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달걀 같은 외형의 목련꽃 봉우리를 통해서 새의 알을 떠올렸고, 햇살을 받아 피어나는 혹은 벌어지는 꽃봉우리를 통해서 알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새의 부화를 떠올렸으며, 날아가 버린 새와 남아있는 그들의 빈 몸이라는 인식(認識)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실상 같은 허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 같은 실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고 있다. 곧, 지상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과 하늘로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는 것, 사라지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영원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현상들과 그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원리까지 연계시켜서 적극적으로 사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뜻한 봄 햇살과 부드러운 봄바람 속에서 일제히 목련꽃이 피어나는 객관적인 상황으로서 자연현상을, 새떼가 부화하여 날아오르는 과정의 생명력 넘치는 소란스러운 주관적인 정황으로 빗대고 있는 감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소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햇살 속에서 눈부신 목련꽃을 보고 날아가 버린 새떼의 빈 몸이라고 인식한 점은 ‘실체 속의 허상’과 ‘허상 속의 실체’에 대한 존재론적 세계관의 표현으로 선적 고요 가운데로 오감의 촉수를 드리우지 않고는 불가능한 선(禪)과 시(詩)의 어우러짐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