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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감자만 심었을까? 수탈 피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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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감자만 심었을까? 수탈 피하려면...

[왁자지껄 경제학]②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주식 감자에 퍼진 마름병으로 인구 4분의 1이 줄어-아일랜드인들의 애환과 아픔이 고스란히 그 한 톨에...

▲로완길레스피의청동작품<기근>.
▲로완길레스피의청동작품<기근>.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항구 초입에 로완 길레스피라는 꽤 유명한 미술가의 ‘기근’이라는 청동 동상이 서있다. 굶주림에 지친 농민들이 보따리를 부둥켜안은 채 어딘가로 떠나는 모습이다. 배경은 1845년부터 7년간 계속된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이다.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던 사람들이었다. 1845년 800~830만명이었던 당시 인구의 4분의 1이 그 기간에 사라진다. 100만 명은 아사했고 100만 명은 아일랜드를 떠났다. 186척 이민선에 나눠 탄 그 100만명 중 20만명은 도중 아사 혹은 병사했다. <기근> 동상이 있는 자리가 최초의 이민선이 출발한 자리다. 기근의 원인은 감자에 퍼진 마름병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이 마름병을 유발한 균이 ‘파이토프토라 인페스탄스’(Phytophthora infestans)라는 것을 밝혀냈다. 지금은 사라졌다. 1844년 미국에서 출현해 이듬해부터 유럽으로 확산된 이 균이 1845년 여름 유럽 대다수 지역이 온화했지만 습기 많은 영국과 아일랜드에 창궐한 것이다. 감자 기근은 토양에 감자라는 단일 작물을 재배한 사실이 질병에 대한 대응능력을 저하시키고 결국은 인간의 삶까지 위협하게 됐다는 매우 결과론적이고 도식적인 후대의 논쟁을 불러왔다.
▲감자는아일랜드인들을생존시켜준구세주이자수탈의상징이다.
▲감자는아일랜드인들을생존시켜준구세주이자수탈의상징이다.
하지만 감자 기근의 이면에 영국인들의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수탈과 착취라는 보다 근원적이고 서글픈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논쟁은 쓸 데없는 짓이다. 12C 후반 이후 아일랜드는 줄곧 영국 식민지였다. 영국은 토양이 척박해 자급자족이 어려웠고 상대적으로 풍족한 기후와 토양을 가진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량 조달창구가 됐다. 구한말 일본이 조선을 쌀 수탈기지로 삼은 것과 비슷하다. 그 수탈량은 엄청났고 특히 밀의 경우, 거의 전량을 영국이 가져갔다. 참다 못한 아일랜드인들이 17C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섬을 초토화한다. 농작지는 물론이고 곡물창고나 방앗간 등은 모두 불태웠고 가축은 모두 도륙해 버렸다.
감자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도랑으로 둘러싸인 좁고 축축한 땅에서 자랐기 때문에 불태우기 어려웠고 맛도 없었다. 아일랜드 입장에서는 경작에 별다른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고 불태워진 창고와 방앗간 없이도 보관이 가능했다. 유일하게 수탈 대상에서 제외된 주식 감자에 병이 퍼지자 아일랜드인들은 굶어죽어야 했다. 아일랜드는 영국에 인도적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들의 저항을 괘씸하게 여기던 ‘갑 중의 갑’ 빅토리아 여왕은 이를 거부하고 타국의 식량 원조마저 봉쇄한다. 17C 중엽 독립운동은 격화된다. 1641년~1652년 아일랜드 인구의 80%가 죽거나 도망갔다. 감자의 역사를 살펴보자.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수탈을 시작한다. 신대륙의 금과 은을 노린 스페인의 탐욕은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무너트리면서 실현된다.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에 대한 미확인정보를 믿고 물밀듯 대륙을 넘어왔다.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도 동참한다. 막상 신대륙에 금, 은 보화는 없었다. 대신 약탈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담배와 커피, 그리고 코코아나 설탕 등 소위 중독성 식품들이었다. 그 맛에 빠진 유럽인들은 신대륙에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했고 그들 눈에는 사람이 아닌 검은 원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해 좁은 화물칸에 싣고 다니다 병들면 바다에 내다버리고 살아남으면 노예로 부렸다. 그런데 단위생산량이 탁월하고 아무 데서나 잘 자랐고 추위도 잘 견뎠고 재배도 쉬웠던 감자는 정작 유럽인들에게는 맛이 없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였다. 1630년 프랑스 의회는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리므로 이 작물을 재배하면 벌금형을 내린다“는 포고령까지 내렸다. 17C 유럽인들은 풍족했고 잉여생산물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인구가 급증하고 18C들어 흉년과 전쟁이 이어지자 유례없는 식량위기가 이어진다. 그때 감자가 재평가 대상이 된다. 유럽 전역에서 감자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 유럽 몇몇 국가들은 감자심기를 권장했다. 감자를 천대했던 프랑스 역시 18C 후반 학자 '파르망티에'를 통해 보급에 나선다. 원인은 비극적이지만 이미 17C말부터 감자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중요 식량원이 됐다. 성인 남자 기준으로 하루 8개 정도의 감자로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아일랜드 인구가 빠르게 절대군주 빅토리아에게 개기던 그때 수준을 회복하는 데 무엇보다 감자의 역할이 컸다.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소작의 대가로 땅 한 뙈기를 빌릴 수 있었고 수탈을 피해 영국인들이 가져가려 하지 않는 감자만을 심었다.
▲감자대기근은아사자와이민자를동시에양산했다.
▲감자대기근은아사자와이민자를동시에양산했다.
안정적 감자 수확량 덕분에 18C에는 가난한 농민들도 영국이나 프랑스 농부들보다 더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이에 주목한 학자들도 있었다. 가난한 동네인데 오히려 인구가 늘고 흉작에 상관없이 늘 일정 생산량을 유지하고 평생 감자만 먹는데도 아무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 것에 주목한 사람들 말이다. 당시 아일랜드인들의 감자는 유럽 전역에서 치열한 논쟁거리가 됐다. 그들에게 감자가 힘없는 민족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무시된채 굶주린 대륙 유럽을 구원할 희망이라는 주장마저 나왔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에서는 자본가들에 의한, 극히 자본주의스러운 '감자 보급론'이 등장한다. 감자같은 싸구려 작물이 많이 보급돼 노동자들의 최저생계비가 떨어지고 그러면 더 낮은 임금으로도 노동자들을 부릴 수 있다는, 소위 쓰레기 같은 이론이었다. 자기들은 안 먹어도 저임금의 당위성 설득을 위해 감자 보급을 외쳤던 것이다. 영국 노동자들도 발끈했다. 그들 눈에는 ‘짐승’ 수준인 아일랜드 농민들이 먹는 감자를 자신들에게 먹이려 한다며 격렬하게 저항한다. 이쯤되면 감자가 뭔가 새로운 위상을 가져야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경제였다. 상당량의 밀을 수입했던 영국에서 국제 밀 가격이 상승하자 빵 소비를 줄여야 했던 영국인들이 점차 감자를 먹고 이렇게 아낀 돈으로 쇠고기, 돼지고기, 치즈, 칠면조, 닭을 사먹는 유행이 생긴다. 요즘은 아일랜드 사람들보다 영국인들이 감자를 더 많이 먹는다니 역사는 말 그대로 아이러니다. 동유럽에서는 감자가 생산량이 많고 보관이 쉬워 군용식량으로 쓰였다.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 농사를 적극 독려했다. 라이벌이었던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1778년 바이에른 왕위계승 전쟁은 양국이 군용 식량을 거의 감자에 의존했다고 해서 ‘감자전쟁'으로도 불린다. 전쟁은 보헤미아 지방의 감자 수확고가 다 떨어져서야 끝났다. 감자 대기근은 19C에 있었던 또한번의 사태와 이어진다. 대기근은 1871년을 기점으로 진정되지만 1879년 또한번 감자농사가 흉작인데다 미국산 저가 옥수수로 인해 곡물가격이 떨어지자 영국인들은 그 책임을 아일랜드 소작인들에게 전가했고 흉작임에도 소작료를 악착같이 거둬갔다. 참다못한 아일랜드인들은 '토지연맹'을 결성, 소작료 낮추기와 노동 조건 개선에 나선다. 연맹이 구사한 전술이 바로 '보이콧운동'이다. 아일랜드 메이요 지방의 토지 대리인이었던 영국인 보이콧(Boycott) 대위가 가난한 소작인들을 내쫓고 다른 주민들에게 추수를 맡기려 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연맹의 제안에 따라 추수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보이콧’이라는 단어는 세계 역사 속에 남았다.
▲최근아일랜드정부수반으로서는처음으로영국을국빈방문한마이클히긴스대통령(오른쪽두번째)이윈저궁에서엘리자베스여왕및부군필립공과함께환영식에참석하고있다.맨왼쪽은사비나히긴스여사다.
▲최근아일랜드정부수반으로서는처음으로영국을국빈방문한마이클히긴스대통령(오른쪽두번째)이윈저궁에서엘리자베스여왕및부군필립공과함께환영식에참석하고있다.맨왼쪽은사비나히긴스여사다.
오랜 투쟁 끝에 아일랜드는 1922년 독립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북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놓고 영국과 싸워왔다. 영국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취임 초기 감자 대기근이 역사적 과오였다며 공개사과하기도 했다. 감자에 얽힌 아일랜드인들의 아픈 역사는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에게 행한 36년 식민지배를 연상시킨다.

산업/IT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