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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파(舞派)경계 허물고 새 지평 향해 가는 진전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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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파(舞派)경계 허물고 새 지평 향해 가는 진전의 몸짓

[무용리뷰] 한혜경, 김은희, 진유림, 이정희 공동 안무의 『한·김·진·이의 예』

지난 5월 24일 오후 6시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펼쳐진 『한·김·진·이의 예』(韓·金·陳·李의 藝)는 한국 전통무의 화려한 변신, 춤 연기자들의 학구적 자세, 전향적 모습을 보여준 참신한 기획이었다. 전통무용 중 자신의 고유영역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춤을 서로 추어 보임으로써 상대방의 춤을 이해하고, 관객들에게 현실과 역사를 무시하지 않고, 우리 춤의 고답적 매너리즘을 우회한 칭찬과 격려의 대상이 되어야할 파격적 시도였다.

열린 춤을 지향한 이번 춤은 50년대 초반부터 후반 출생의 중견 한국무용가 한혜경, 김은희, 진유림, 이정희가 의기투합한 『한·김·진·이의 예』 다섯 번째 춤판이었다. 원류와 새로운 문화원형의 창출은 늘 해석의 미묘한 차이를 낳지만 한혜경의 ‘도살풀이춤’과 ‘12체 장고춤’, 김은희의 ‘호남산조춤’과 ‘승무’, 진유림의 ‘태평무’(강선영류)와 ‘살풀이춤’, 이정희의 ‘한량무’와 ‘매헌입춤’은 무파(舞派)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지평을 향해 가는 진전(進轉)의 몸짓이었다.
춤에 대한 박식과 여유가 없으면 변주라는 ‘울타리 너머’를 생각할 수 없다. 또 다른 세상과 어울림을 가져보는 것 자체가 원형을 훼손한다는 공박으로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네 춤꾼들은 본산을 갖고 있는 타 영역에 대한 예의와 무서운 균형으로 창대를 이룰 근거를 마련하였다. 제의에 가까운 섬세함으로 우리 춤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네 춤 작가의 흥분을 일구는 의리적 도전적 춤판은 우리 춤의 생존을 가늠하는 춤 환경의 생태적 미래학 보고서이다.

김은희의 '승무'이미지 확대보기
김은희의 '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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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의 '호남산조춤'
『한·김·진·이의 예』는 김은희의 군무 ‘승무’에서 시작하여 한혜경의 군무 ‘12체장고춤’으로 마무리 된다. 집중과 몰입에서 시작하여 신명으로 마무리된 춤은 춤 연기자들의 탐구와 호기심이 낳은 빛나는 광휘(光輝)로 우리 춤의 정체성과 변주의 묘미를 절묘하게 보여주었다. 미토스의 사계(四季)에 걸친 춤들은 처연함에서 초연함까지를 어우른다. 우리 춤의 기본 레퍼토리로 틀을 짠 춤판은 작은 손짓 하나, 디딤새에도 고도의 기교와 정교함이 들어가 있었다.

김은희 주도의 ‘승무’(이매방류)는 독무로 법고를 향해 등을 보인 앉은 자세에서 관객들의 몰입을 요하면서 시작된다. 다섯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가지런히 내려앉고, 악사의 여린 북이 분위기를 돋운다. 긴 장삼, 고깔, 북, 북채를 두고 화두를 깨우쳐 가는 춤은 하나, 다섯, 열둘로 춤꾼들의 숫자를 늘여간다. 백적청(白赤靑)의 색조에 담긴 춤의 상징은 호기심을 자아내며 음감, 공간구성과 배치, 진법, 호흡의 높낮이를 보여주며, 승무가 갖는 무게감과 격조를 품어낸다. ‘승무’는 절제와 비움, 교훈적 내용을 잘 연기해낸 김은희의 완벽한 춤 구성, 춤사위의 정묘함은 기교와 춤 정신이 합일된 ‘대중’을 위한 춤이었다. 출연(김은희, 신미경, 빈주연, 박연주, 노한나, 한지윤, 김수정, 하서정, 최윤정, 이원지, 김고언)

이정희의 '매헌입춤'이미지 확대보기
이정희의 '매헌입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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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의 '한량무'
이정희 주도의 ‘매헌입춤’은 고(故) 매헌 김숙자 선생의 춤을 기본으로 하여, 팔이나 몸의 관절을 이용한 손짓, 위아래로만 움직이는 몸짓으로, 자유롭게 추어내면서도 우리 전통 춤이 신명을 불러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볍게 뛰고, 돌면서 열두 명의 춤 무리는 그 위용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백색을 주조로 한 치마, 저고리에 자주 고름을 단 여인들은 입춤의 자유성을 즐기면서도 서로 소통하고 내재적 절도를 지켜낸다. 네 명의 남성이 편성된 것이 특색이며 춤을 추다가 손이 툭 떨어지며, 몸이 휘어지고, 가리키는 세부 동작들이 흥미롭게 닥가온다. 춤 연기자 숫자로 강약을 조절하며 자진 굿거리로 시작하여 마지막 이정희와 남성 연기자의 3인무는 자진모리에 소고를 가지고 춤을 추면서 끝을 맺는다. 정상의 기량을 보유한 이정희 춤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유의미한 그녀의 지속적 춤 작업이 말해준다. 출연(이정희, 한수문, 이주원, 현성훈, 권상효, 김애련, 양혜정, 이미란, 정지혜, 박성희, 장보름이, 이수정)

진유림의 독무 ‘태평무’(강선영류)는 춤 외적인 요인과 결부될 수 있는 가치를 소지하고 있다. 그녀 자체가 지니고 있는 탐미적 분위기와 비주얼에 대한 일관된 미학적 접근 방식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춤 체는 음악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나라의 풍년과 태평성대를 축원하는 ‘태평무’ 춤의 원형의 의미와 연희자 사이의 심리적 간극을 잘 해석해 내고 있다. 노련미와 세련미를 갖춘 그녀의 춤은 자신의 독특한 연기력의 분출로 청어람우리춤연구회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의젓하면서도 경쾌하고 가볍고도 절도 있게 몰아치는 발 디딤새’라는 춤 관습을 뛰어넘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춤이었다. 왕십리 당굿의 칙칙한 한계를 극복하고 하늘과 땅의 기운을 명쾌한 발짓과 손놀림으로 ‘연분홍 심사’를 완급을 조절하며 춘 춤은 우아했으며 섬세한 묘사가 잘 숙성된 매실에 비유될 수 있는 품격을 지닌 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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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림의 '살풀이춤'
한혜경의 독무 도살풀이춤(김숙자류)은 경기도당굿의 뒷전거리에서 추어지던 살풀이춤의 원형을 원전으로 삼는다. 구음을 포함한 국악 오케스트라는 긴 수건을 들고 흉살과 재난을 소멸시켜 안심입명, 나아가 행복을 맞이한다는 춤의 분위기를 돋운다. 슬픔이 역류(逆流)하여 기쁨으로 바뀌는 지혜를 택한 춤은 자연스럽고 소박하여 ‘보존의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삶의 깊은 뜻에 담긴 춤 수사는 이 춤이 소유물이 아닌 생산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 있어서 무채(舞彩)는 영웅적인 춤의 존재를 알게 되어 안정감을 얻는 연희자의 현재를 읽게 한다. 긴 수건, 연희자, 음악, 조명이 빚어내는 비주얼은 독특한 공간감을 확보하여 긴장감과 신비스러움으로 전통춤의 여운을 남기며 훌륭한 춤이 가져야할 ‘심연의 미학’을 보여준다.
김은희의 독무 ‘호남산조춤’은 판소리와 시나위를 바탕으로 한 산조음악에 맞춘 입춤이다. 그녀는 진양조에서 자진모리까지 느림에서 쾌속의 장단사이를 넘나들며 호남지방 기방춤이 가지고 있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한, 흥, 신명에 담아 고도의 진지성을 견지하며 규수들의 격조를 섬세한 몸짓으로 잘 표현해 내었다. 김은희는 ‘호남산조춤’의 성격, 주제, 배경에서 드러나는 천지인(天地人)의 조화와 절주(節奏)를 따르는 몸의 기(氣)와 리듬을 춤으로 자유롭게 형상화하며 이 춤의 열광적 매혹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청명한 하늘의 기운이 퍼지는 가운데, 긴 호흡으로 달의 정기를 담아내는 여인, 앉은 자세에서 출발한 춤은 잔 발 디딤과 회전, 치마 터치에 이르는 세묘(細描)로 생동감 있게 한바탕 시름을 풀어낸 뒤 앉은 자세로 끝맺음을 한다. 마무리에 수반되는 대금, 김은희는 가을의 ‘정한의 미학’을 잘 연출하였다.
이정희의 독무 ‘한량무’(김숙자류)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춤이다. 주로 남성들이 담당했던 춤 영역에 여성 춤 연기자가 도전장을 내고 양반이 아닌 서민들이 추는 춤을 선보임으로써 ‘규범 너머의 어울림’을 연출해 내었다. 도포에 갓, 부채를 들고 주제의 통일성을 훼손시키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제시한 과감한 모형은 변체가 원형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녀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서민들이 자신의 고달픈 삶에 대한 애환과 부패한 양반사회에 대한 불신감을 몸짓으로 풍자한다.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역동적 춤으로 故 김숙자의 ‘한량무’를 이정희가 처음으로 재현한 무대는 감상을 넘어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풍자와 유머를 섞어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교재는 엄숙한 공감을 도출했다.

한혜경의 '도살풀이춤'이미지 확대보기
한혜경의 '도살풀이춤'
진유림 주도의 군무 ‘살풀이춤’(이매방류)은 비교적 밝은 조도로 다듬어진 조명 속에 하얀 치마, 저고리에 분홍고름이 돋보이는 가운데 발레블랑에 버금가는 한국 춤이다. 진유림은 군무의 힘, 한 송이 보다 열 두송이 찔레꽃이 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백색제의였다. 춤을 주도하다가 사라졌다 다시 등장하는 연출로 판타지를 극대화 시킨 춤은 구음으로 분위기가 고조되고 정제된 한과 신명으로 불가피한 운명을 위무한다. 우울한 명상을 털어내고 청아한 아침을 맞이하는 여인들의 춤은 연민과 관심의 ‘정한의 미학’으로 승화된다. 조화를 이룬 미장센으로 공포와 연민의 카타르시스는 공감을 낳고 절묘한 균형감의 ‘살풀이춤’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출연(진유림. 최정윤. 이현숙. 김형신. 백수연. 하명초. 이승주, 김보영. 이현희, 정숙희,노채명. 박지운)

한혜경 주도의 군무 ‘12체장고춤’은 그 원형이 12체 교방 장고춤이다. 일제말, 대정권번의 김취홍에 의해 추어졌던 장고춤은 오천향을 거쳐 한혜경에게로 전승된다. 공연된 한혜경의 장고춤은 교방장고춤과 故 이정범 선생의 호남우도 설장고 가락을 포집, 무대예술화한 춤이다. 극적 구성의 묘는 발이 쳐진 가운데 돗자리 위에 한혜경이 장고를 곁에 두고 앉아 상념에 사로잡혀 있음에서 시작한다. 여자의 구음에 따라 한혜경이 서서히 일어나면서, ‘12체장고춤’이 발흥된다. 붉은 치마에 노란 저고리의 그녀는 독무를 춘다. 이윽고 그녀를 둘러싼 무리들 등장한다. 한혜경은 무리를 선도하다 사라지고, 그 자유 공간을 내어주었다가 다시 등장하는 연출의 묘를 보이면서 3인무, 5인무 등으로 진법이 바뀌면서 색감과 생동이 살아있는 비주얼은 피날레 작품으로 손색이 없이 예술성을 극대화 시키면서 장고춤의 멋을 한껏 보여준다. 그 신명으로의 산책은 서민유희의 장점으로 크게 부각된다. 출연(한혜경. 박은하. 임미례. 김영운. 이지은. 박명옥. 곽우주. 나연주. 이예본. 조태욱)

한혜경의 '12체장고춤'이미지 확대보기
한혜경의 '12체장고춤'
한혜경, 김은희, 진유림, 이정희 네 무사(舞師)의 『한·김·진·이의 예』는 사회변화에 따른 우리 춤의 상황을 현실에 적용시켜 상상력을 극대화한 미토스로 봄날의 저녁을 간지럽히며 유쾌하게 우리춤의 위상을 격상시키고, 관객들을 흡인시킨 공연이었다. 봄날, 우리춤의 지성들이 몸으로 풀어낸 무시(舞詩)는 우아한 서정적 감흥으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

장석용 객원기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